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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923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3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9/05 21:31:3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박형준, 초저녁 달




내게도 매달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이슬로

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그러나 때로는

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석양 속을 날아온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나무에 내려앉듯이


불 속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타지 않는

화로가의 농담(濃淡)으로 식어간다


내게도 그런 뜨겁지만

한적한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다

 

 

 

 

 

 

2.jpg

 

송승언,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공원에 갔어

다듬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자주 보던 금잔화를 보려고 했지

그런데 그곳에 금잔화는 없었다


노란 게 예뻤는데 벌써 철이 지난 거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철없는 사철나무도 마가목도 청자색 수국도 없었다

주인이 죽어 주인 없는 개도 없었고 아무도 없는 정자도 없었지

공원을 뒤덮는 안개도 없었

모든 것이 흐린 공원이었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뚜렷이 잘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명징한 공원이었다

배후에서 갈라지는 길이 보이지 않은

 

 

 

 

 

 

3.jpg

 

김경미, 열쇠




자주 엉뚱한 곳에 꽂혀 있다


달력도 친구도 가구도

수평선도 라일락나무도 심장도

뱃고동 소리도 발소리도 저주도

언제나 제 집에 딱 꽂히지 않는다


바늘이 무던함을 배워 열쇠가 되었다는데

미간을 사용하지 말자


구름을 사용하자

나뭇잎을 사용하자

귓바퀴를 사용하자

 

 

 

 

 

 

4.jpg

 

권현형, 달콤한 인생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

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

밤 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설탕을 타 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손목에 내려 앉아

마음을 어지럽히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

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

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보듯이

어머니는 젖은 눈으로

흰 눈, 흰 눈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초저녁 아버지 제사상을 물린 끝에

맞이한 열다섯 겨울

첫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는 다가올 첫사랑을 기다리며

첫눈 내리는 날이면

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 속에서

늘 눈막걸리 냄새가 납니다

 

 

 

 

 

 

5.jpg

 

최정례, 길에 누운 화살표



네 비행기 날아가고


지금쯤 구름 속에 있겠다

바다 위에 떴겠다

드디어 땅바닥에 닿았겠다


그러나 생각 않기로 한다

대신 네 호흡인 구름에게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가 있다고 전한다

좌판에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

서로의 볼을 맞대고 있다고


내 앞에 트럭이 지나간다고

굵은 대파가 책처럼 높다랗게 쌓였고 밧줄에 묶였고

뿌리는 뿌리끼리 푸른 잎은 잎끼리

서로가 서로를 꽉 채우고 빈틈 하나 없이 저렇게

묶여 실려간다고


허공 속의 공책에

사과를 사과나무를

다 마셔버리고 싶다고 쓴다


사과나무 한 채를 다 마시고

지금쯤은 구름 속인지 바다 위인지 땅바닥인지


길바닥에 누운 화살표에게 묻는다


좌로 꺾인 하얀 화살표 따라간다고 쓴다

희망은 난폭해서

날마다 쫓기며 가보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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