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비가 온 시애틀, 잔디를 제대로 깎을 날도 없었습니다. 주말 들어서야 처음으로 맑은 날씨가 됐고, 계속해 지겨울 정도로 내린 비로 인해 잔디밭은 주중엔 거의 질척거릴 정도였지만 주말엔 땅이 마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큰 집을 소유한 부자들이야 사람들 사서 잔디 관리를 하겠지만, 이른바 서버번 sub urban 에 집을 갖고 메트로폴리탄 지역으로 출퇴근하는 평범한 미국인들은 주말엔 정원사가 돼야 하고 목수가 돼야 합니다. 시애틀이란 도시가 생기고 나서 이렇게 비가 내린적이 없었기에, 앞마당 뒷마당 모두 끔찍할 정도로 풀이 자라 있습니다.
잔디 깎는 기계, 론 모어를 참 오랜만에 돌립니다. 휘발유를 채우고 오일 레벨도 체크하고 나서 잔디를 깎습니다. 그리고 나서 트리머 trimmer 라고 부르는 기계로 잔디밭 가장자리를 쳐 줘야 합니다. 이 트리머는 전동 모터로 돌아가는 기계인데 낚시줄 같은 것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돌아가며 높게 자란 잔디나 풀, 론 모우어 기계가 가서 닿지 않는 부분들을 쳐냅니다.
겨우내 쓰지 않던 기계들이 바깥으로 나와 처음으로 햇볕을 봅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게 있습니다. 그동안 비 때문에 잔디 사이사이에 보이지 않게 자란 이끼입니다. 이것들을 쳐 내는것은 약을 치던지, 혹은 레이크 rake, 즉 자루에 넓적한 긁개가 달린 기구로 빗질해주듯 잔디밭을 긁어주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것은 이걸 그냥 둘 경우 잔디밭이 마치 지금 제 머리카락처럼 된다는 겁니다. 모르는 사이에 이끼는 그렇게 잔디를 잠식하고는 맨땅을 드러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걸 긁어내는 작업은 중요합니다. 이게 생긴것도, 색깔도, 조금 바랜 잔디와 비슷하게 생겨서 사람을 게으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맨 땅이 다 드러나고 나서야 사람을 놀라게 만듭니다.
이렇게 맨 땅이 드러난 곳은 귀찮지만 이 땅을 다시 긁어서 새로 씨를 뿌리고 물을 줘서 어떻게든 잔디가 자라도록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에 훨씬 귀찮은 일이 생깁니다. 따라서 그냥 잔디 깎을 때마다 긁개질을 해서 이끼를 없애주는 것이 최고입니다. 문제는 이게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는 겁니다. 이끼는 왜 이리도 많이 생기고, 그렇게 빨리 자라는지. 그리고 왜 이리 잔디와 비슷하게 보이는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적폐도 그런 겁니다. 적폐가 자라면 정상적으로 자라는 사회를 숨쉴 수 없게 만듭니다. 문제는 이끼가 잔디 사이에서 정상적인 잔디처럼 보이는 것처럼, 적폐도 오래 두면 그냥 그것이 정상적인 사회풍토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놔 두면 안 됩니다. 적폐는 시간이 걸려도 긁개로 다 긁어내야 합니다. 잔디밭에서 이끼를 긁어내는 것처럼, 쉬지 않고 항상 긁어내는 지루하면서도 힘든 작업이 될 겁니다. 마치 긁어도 긁어도 계속 나오는 이끼처럼 우리 안에 끼어버린 적폐는 끝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잔디밭을 싹 갈아엎어버리고 씨를 새로 뿌리는 것처럼 혁명을 해 버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적폐를 청산하는 것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나올 것임을 인정하고, 그 작업을 함께 나눠 져야 합니다. 적폐청산의 의지는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그것을 한꺼번에 모두 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그래서 5년동안 이 작업을 매일 매일 한다고 해도 어려울 겁니다. 그 뒤를 또 적폐청산의 의지를 가진 새로운 대통령이 이어받아 같은 작업을 적어도 몇십년은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구현의 가치를 가진 세력이 계속 집권해야 하고, 적폐를 만들어 온 세력들이 그 기간만큼 집권을 꿈꾸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히려 참을성, 인내일 겁니다. 오늘 내일 되는 적폐청산이 아니고, 적폐를 쌓아온 세력들의 반격도 여전할 테니까요. 우리가 해야 하는 적폐청산의 길은 내가 오늘 이렇게 잔디에서 이끼를 긁어내는 것처럼 지루하고 반복적이고 힘든 작업일 겁니다. 그렇지만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푸른 잔디가 죽어 버리니까.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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