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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혐]나는 나를 요리한다
게시물ID : panic_924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수컷수컷
추천 : 22
조회수 : 3947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7/02/12 20: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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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벽장 시계 속에서 뻐꾸기 횃대만 나온다. 시계는 울지 않는다. 시계 속 뻐꾸기는 오래 전에 잡아먹었다. 더 이상 시간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동안 내가 먹어본 것들을 떠올려본다. 여러 가지 있었지. 갖은 산해진미에서부터 오지의 전통음식, 남들이 듣기만 해도 질색하는 몬도 카네(Mondo Cane怪食), 심지어 오랫동안 인륜으로 금지되어 온 음식들깢. 그 중 특이할 만한 것은 역시, 산달 직전 태아 고기 요리 정도일까. 나의 식()에 대한 욕심은 생물의 것을 넘어 무생물의 영역까지 치솟았다.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것은 늘 타고 다니던 메르세데스 벤츠-의 모듬 요리였다. 온갖 조리 방법을 다 동원해도, 쇠를 씹는 건 고역이었다. 같이 살던 여자의 악어가죽 백은 먹을 만했다. 원재료가 동물의 가죽이었기에 가능했지. 내가 먹을 수 있는 것과 도저히 어떻게 해서도 먹을 수 없는 것의 리스트를 만들어 목록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니, 종국에 내게 남은 것은 하나 밖에 없었다.

시작은 몇 분 후로 설정하시겠습니까?’

인공 눈알을 통해 들어오는 메시지는 살아있는 눈을 통해 들어오는 것보다 맑고 선명하다.

왜 진작 눈을 먹어버리고 인공장기로 교체한단 생각을 하지 못 했을까. 젤라틴을 채운 눈알 슬라이드는 샐러드와 궁합이 환상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안 드레싱과 제일 잘 어울렸다.

시작은 몇 분 후로 설정하시겠습니까?’

재촉하듯 메시지가 다시 뜬다. 음성 인식 시스템이라, 불편하지만 의수를 움직여 보이스 생성기를 통해 음성으로 시간을 인식시켜야 한다. 조금 전 내 성대를 먹었기 때문에 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니, 막 먹어버린 성대의 맛이 생각난다. 발렌시아 산 최고급 암염에 버무려 동양식으로 무침을 해서 먹었다. 다시 그 맛을 떠올리니, 순대로 만들어 먹은 내장이 꿈틀거리는 기분이 든다.

‘5…

의수의 손가락이 천천히 쿼티 자판을 누른다. 차가운 금속의 터치감이 아직 남아있는 뇌의 감각체를 자극한다.

나는 오른손잡이였기에, 오른쪽 팔의 근육이 더 많아 왼쪽 팔이 더 부드럽고 지방도 적당했다. 왼팔은 와인에 재운 뒤 구워먹었고 오른팔은 고기가 질겨 일본간장을 베이스로 한 양념에 담가 조림으로 해서 먹었다. 가장 맛있었던 부위는 역시 안쪽 허벅지 살이었다. 클래식하게, 소금과 후추만으로 간을 해서 스테이크를 해서 먹었는데 어찌나 맛이 있던지! 그때 맛을 떠올리니 저절로 입에 침이 돈다. 살아오며 입에 넣어본 스테이크 중 단연 최고였다. 한입 베어 물자 가득한 육즙하며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육질! 품종 개량하여 다리가 8개 달린 돼지처럼 나를 바꿀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준비 완료.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앉는다. 거울 속 나는 오래 전 사교계의 총아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허리 밑으로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고 양팔은 기계로 된 의수, 내장도 먹어 치워 배는 내용물 하나 없는 가방처럼 흐물흐물 거린다. 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치아가 훤히 드러나, 어디를 보아도 흉물이란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곧 내가 모르는 미지의 맛을 알게 될 텐데.

의자 뒤로는 자가 외과수술에 사용되는 정교한 기계가 있다. 로봇 팔에는 몇 개의 외과수술용 톱이 매달려 있고, 다른 로봇 팔에는 새하얀 접시가 올려져 있다. 나머지 로봇 팔은 집게를 개조하여 스푼과 포크, 나이프로 바꾸었다.

톱날들은 정확히 내 머리를 향하고 있다.

시간이 되면 저 톱날들은 내 머리를 가르고 거기서 나의 뇌를 꺼내어, 자동으로 내 입을 향해 넣어줄 것이다. 순서는 완벽하다. 우선은 대뇌의 언어 부분을 관장하는 부위를 먹을 것이다. 그 다음은 사고력과 기억력을 관장하는 부위를 먹고, 다음이 소뇌다. 절대 미각을 담당하는 부위를 건드려선 안 된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는 몇 번이나 실험을 해보았다.

준비는 완벽하다.

매직을 쥔 로봇 팔이 눈썹 위에서부터 한 바퀴 돌아가며 톱날이 거쳐야 할 루트를 정해준다. 레이저는 쓰지 않을 것이다. 레이저의 열기로 뇌의 맛이 변질될 수 있으니까. 무통주사도 놓지 않을 것이다. 주사의 약 성분은 미각을 방해한다. 온전한 정신으로 내 머리를 열어 그 안에 담긴 호두 같이 탐스런 나의 뇌를 맛볼 것이다.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역시 마지막에 먹어버린 혀 정도 일까. 혀 없이 먹는 뇌 요리는 아무래도 탐닉할 수 있는 감각이 떨어질 테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뇌를 먹고 혀를 먹을 수는 없잖은가.

나의 뇌는 나의 뇌를 먹으면서 무슨 맛이라고 생각할까. 맛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Bon Appetite!’

기계가 마지막 인사를 날려준다.

톱날이 다가온다. 나는 흥분상태에 돌입한다.

나는 과연 무슨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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