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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장독 하나 묻어 두고
앵두나무 그늘 아래 장독대를 생각한다
이른 아침 커다란 독 뚜껑을 다른 장독 위에 올려놓고
고추장 몇 숟가락 탁탁 소리 나게 퍼 담던
굵은 손마디
찬바람 속에서 한 해 먹을 고추장을 담그며
말하지 못한 속내를 어머니는
장독 속에 묻었다
새빨간 고추장에 싹싹 비빈 밥을 입속에 퍼 넣을 때
할머니와 아버지 언니와 나는
흔적 없이 잘 삭은 어머니 속내를 먹었다
더러는 짜고 더러는 매웠던
소리 내지 않는 한 시절을
온가족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푸른 잎 사이에서 소리 없이 앵두가 익어가던
장독대의 봄날처럼
베란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덜 삭은 마음들이 맵고 짠 맛을 내며
가슴에서 밀려올 때
붉고 따뜻한 몸 안의 길을 따라
늙은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다녀가신다
양광모, 마음꽃
꽃다운 얼굴은
한 철에 불과하나
꽃다운 마음은
일생을 지지 않네
장미꽃 백 송이는
일주일이면 시들지만
마음꽃 한 송이는
백 년의 향기를 내뿜네
오시영, 돛단배
세상이 무어라 해도
나는, 나의 눈을 가질 거야
내게 소리로 오는
향기로 오는
너를 제대로 알아보는
나만의 눈을
박영근, 탑
저 탑이
왜 이리 간절할까
내리는 어스름에
산도 멀어지고
대낮의 푸른빛도 나무도 사라지고
수백 년 시간을 거슬러
무너져가는 몸으로
천지간에
아슬히 살아남아
저 탑이 왜 이리 나를 부를까
사방 어둠 속
홀로 서성이는데
이내 탑마저 지워지고
나만 남아
어둠으로 남아
문득 뜨거운 이마에
야윈 얼굴에 몇 점 빗방을
오래 묵은 마음을
쓸어오는
빗소리
형체도 없이 탑이 운다
금간 돌 속에서
몇 송이 연꽃이 운다
유창섭, 창밖의 길
햇볕이 쨍쨍 소리 내며
부서지는 낮에도
어둠에 갇혔다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곳으로 열려 있는
창밖은 온통 길뿐
길 아닌 곳은 없었다
어둠보다도 더 어지럽게 생각은
흩어지고 길은
아무데고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갈 데가 없음을 알았다
갈 길이 없음을 알았다
할 일이 없음을 알았다
아무도 없음을 알았다
가장 청명한 날
가장 어두운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