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항쟁 이후 문재인의 80년대 후반, 90년대 중반까지의 변호사 활동의 중심 중 하나는 '경찰의 고문 관행 없애기'였습니다.
89년 8월의 한 기사입니다. 당시만 해도 증거를 기반한 기소보다는 고문을 통한 자백을 근거로 기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재인을 비롯한 민변의 변호사들은 이러한 관행을 없애기 위한 여러가지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고문 관행은 그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경찰 뿐만 아니라 '수사관'이란 이름이 붙은 사람들이 행하는 고문도 예사였습니다.
91년 3월의 한 기사입니다.
80년대 후반 부산에서 세관원 3명이 침대 매트리스를 밀수한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물고문으로 자백을 받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당시 검찰은 조사만 한 채, 그 세관원들을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특별검사를 도입했지만 처음 지정된 특별검사 역시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가 없다고 판단되어
부산변호사회에서 문재인 변호사를 추천하여 추가로 특별검사로 임용됩니다.
결국 세관원 3명 중 2명이 실형을 선고받습니다.
94년10월 부산의 한 초등학생이 유괴된 뒤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었던만큼 경찰은 빨리 실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를 충실히 확보하기 보다는
용의자들에게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습니다.
초등학생의 친척이 벌인 단독범행을 그 주변인을 공범으로 몰아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은 것입니다.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진상조사 소위원회는 이러한 사실을 감지하고
당시 경찰서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고문 사실을 밝혀냅니다.
이때 이 위원회의 위원장이 문재인입니다.
경찰과 검찰에서 증거도 없고 알리바이가 확실한 사람들을 무리하게 고문을 통하여 범인으로 만든 이 사건은
결국 1심, 2심, 3심 모두 무죄가 선고됩니다.
증거가 확실한 사건에 대해 무리하게 법 적용을 해 변호를 한 것이라면 그 비난이 이해가 가지만
문재인 변호사가 문제를 삼은 것은 경찰의 고문을 통한 자백 관행이었습니다.
당시엔 경찰의 고문을 통한 자백 관행이 팽배할 때였습니다.
뉴데일리가 언급한 사건은 92년에 일어난 것으로 역시 이 시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그 사건 역시 고문에 의한 자백 등 강압수사 의혹이 있었습니다.
쓰레기 같은 제목을 붙인 곡필을 믿을 것인지,
30년 한 길을 걸어온 인권변호사의 업적과 정신을 믿을 것인지는 유권자의 몫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