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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홍역(紅疫)
석탄(石炭) 속에서 피여 나오는
태고연(太古然)히 아름다운 불을 들러
십이월(十二月)밤이 고요히 물러 앉다
유리(琉璃)도 빛나지 않고
창장(窓帳)도 깊이 나리운 대로
문(門)에 열쇠가 끼인 대로
눈보라는 꿀벌떼 처럼
닝닝거리고 설레는데
어느 마을에서는 홍역이 척촉(躑躅)처럼 난만(爛漫)하다
박철영, 구절초
아늑하다
그대 안
해맑을 수 있으므로
꽃대
마디마디가
죄다 하늘이다
구절초 꽃 핀
저 들녘이
곧 하늘이다
유자효, 정(釘)
햇빛은 말한다
여위어라
여위고 여위어
점으로 남으면
그 점이 더욱 여위어
사라지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으면
단단하리라
김후란, 바람으로 오라
저 나무 잔가지가
춤을 춘다
바람의 장난이다
오늘은 이 마음도 산란하다
흔들림이 있다는 건
살아 있음의 증거
하면 차라리 태풍으로 오라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님을
소리쳐 알려주는
거친 바람으로 오라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라지기 전에 서로의 손길
느끼고 싶다
서정연, 벌레 먹은 나뭇잎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다
온몸에 무늬가 새겨져 있다
누군가 머물렀던 온기
삶의 뒤꼍 같은 길
누가 지워지지 않는 길
새겨놓았을까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훑고 지나간 흔적이다
반쯤 물든 잎사귀는
댓바람을 피하려는 서랍처럼
웅크리고 있다
나도 따라 걸음을 멈추고
오도카니 들여다본다
거기, 당신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