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이었습니다. 북경에서 상해를 가는데 기차를 이용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훨씬 빠르지만 그 지난 겨울에 심양에서 청도까지 중국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가 십년감수 한 후로는 겁이 나서 국내선은 못타겠기에 기차를 탔습니다.
그 땐 비행기를 탄게 아니라 서울대공원에서 청룡열차를 두 시간 연속 탄 것 같은 데 공항에 내려서도 한참이나 다리가 후들거립디다. 저녁 6시 부터 시작한 기차여행은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장장 14시간 계속 되었습니다.
기차는 같은 칸에 침대가 좌우로 2단씩 4개의 침대가 있었습니다. 북경 역에서 애인과 이별하며 서러워하던 아가씨와 나 그리고 엉덩이가 내 서너 배는 됨 직한 미국인 한 명 그리고 젊은 중국 청년 한 명이 같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촌놈은 기차를 먹는 재미로 탄다고 나는 기차를 타기 전에 깐 호두랑 땅콩 한보따리와 청도맥주를 몇 캔 샀습니다.
같은 방에 사람이 네 명이나 있는데 맨숨맨숭 창 밖만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까 고문 당하는 느낌이 듭디다. 그래서 만만한게 아가씨 같기에 상해지도를 펴 보이며 혹시 여기를 아느냐고 물어 보는 것으로 말을걸었습니다. 아가씨가 머뭇거리니까 이층에 있던 중국청년이 관심을 보이고 내려 오고 맥주를 흔들어 보이자 미국아저씨도 내려왔습니다.
역시 말문 여는 데는 술 만한게 없다는 진리 입니다.우리는 서로 고만고만한 외국어 실력을 동원하여 시간 죽이기에 들어갔습니다. 아가씨는 자야 되겠다며 미국아저씨랑 자리를 바꿔 이층으로 올라가고 우리는 밤새 수다를 떨었습니다. 어딜 가나 남자만 남게 되면 으레 나오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 드디어는 거창하게 국제정치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제가 무슨 영어나 중국어에 도가 터서 국제정치에 관해서까지 영중어를 구사해서 수다를 떨었나 하시겠지만 제 외국어 실력은 한문하나 외에는 초짜 입니다. 저는 외국어에 대한 신조가 궁하면 통한다 입니다. 여하튼 의사소통에 큰 지장은 없었습니다. 키워드 한둘만 가지고 나머지는 대충 때려 잡는 식입니다.
중국의 발전에 대한 칭찬을 받고 신화사 통신에 근무 한다던 청년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제게 물었습니다. 한국의 발전은 박 대통령에 의해 그 단초가 제공되었는데 박 대통령의 국가발전의 핵심 전략이 무엇이 었느냐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 기차간에서 박 대통령의 국가발전핵심전략이 뭐였냐는 질문에 진땀이 났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새마을 운동 생각이 나서 그렇게 대충 설명 했더니 그 청년은 내가 무안하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 경제발전의 핵심전략은 '集中化' 라는 것입니다. 60년대 당시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은 자원도 기술도 전무한 상황이라 경제발전의 단초 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산업 이라는것 자체가 전무라 해도 좋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경제발전이란 눈사람을 만드는 일과 같다. 눈사람을 만들려면 먼저 주먹만한 눈을 뭉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주먹만한 눈 뭉치 조차 만들만 한 눈이 한국에는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청년은 눈 뭉치는 시늉까지 내며 내게 설명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래도 한국이 산업국이 되기 위해서는 없는 눈을 만들어서라도 눈사람을 만들어야 한다고 작심했습니다.
청년은 우리의 누나나 어머니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수출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누나의 머리카락이 당시의 우리 나라 산업의 기초 원자재 였다는 게 저도 지금은 실감나지 않습니다. 어떻든 박 대통령은 동원할 수 있는 국가자원은 모조리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여기서 박 대통령의 능력이 놀랍다고 했습니다.
국가자원을 총동원 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게 아니랍니다. 능력이 없으면 있는 자원을 모으는 것도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예를 들어 박 대통령과 비교했습니다. 한국에 비해 자원이 넘치는 이들 나라가 지금은 한국의 반도 못 쫒아 가는 건 동원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당시의 박 대통령과 한국민은 동일한 목표의 설정에 성공했고 그 합의는 '잘살아 보자'였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설명은 계속됩니다.이 총 동원된 자원은 '재벌'이라는 창고에 쌓아두는게 박 대통령의 집중화의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빈약한 자원을 여기저기 분산시키면 힘으로 작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원을 모아두는 저수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재벌'이라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의 계산은 간단했답니다. 저수에 물을 고이게 한다 그래서 저수지에 물이 고이고 고여 넘치면 아래로 흘러가게 마련이고 이는 논과 밭으로 가게 마련이다. 그물이 저수지에 는데 한국은 20년 정도 걸렸답니다. 그리고 그 물이 흘러 넘치기 시작한게 80년대라고 청년은 설명했습니다. 20년 동안 한국인은 고생 했답니다.
노동자가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였고 후세의 지금 당신들이 누리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위상 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원칙적으로 독재는 나쁘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원칙을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물었습니다.
그럼 과거의 재벌은 나름대로의 기능을 했다고 치면 현재 한국의 재벌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하느냐고 했더니 그 청년은 그건 한국인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딸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직도 큰 저수지가 필요하다고 판단 하던지 아니면 작은 저수지를 여러개 파는 게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할 것이라든지 한국인이 판단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중국의 경제 발전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중국이 지금 60년대의 한국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국가자원의 집중화를 위해 재벌과 국가가 정경유착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국가는 마스터 플랜을 재벌은 그에 따른 서브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그래서 한국처럼 단기간에 국가경쟁력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은 한국에 비해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이 풍부하여 한국보다 더 단기간에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며 만약 60년대에 중국에 박대통령 같은 주석이 있었다면 지금 미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그 청년은 한국의 민주화에 관해서 이런 평을 했습니다.
한국 민주화의 일등공신은 박정희다. 경제성장과 정권의 독재는 역방향으로 움직인다. 독재적 경제대국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박 대통령이 종신대통령을 꿈꿨다면 그는 자기발등을 자기가 찍은 것이었다고 .
날이 훤히 밝아오고 기차는 아주 긴 철교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정말 박 대통령은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박정희 눈물 이야기의 진실 추기철 (kcchoo) 2004-02-17 오후 8:11 / 추천 2 조회 328
조폭 신드롬, 그리고 존경받는 인물 1위 박정희
인터넷에 떠도는 박정희의 허상
요즘 육사 교장의 글이라고 알려져 있는 글이 인터넷에 떠다니고 있습니다. 반전, 평화 세력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을 수구, 보수라고 부른다는 젊은이들에게 호통을 치는 내용입니다. 자신들의 피땀이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 기적은 없었다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그 근거로 들고 있는 핵심이 박정희와 관련된 두 편의 눈물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감동적이라고 말하는 이 이야기들의 역사적 진실은 사실과 다릅니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5.16 쿠데타 직후 미국이 박정희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 이야기에서처럼 다른 제3세계 국가에서의 쿠데타를 우려한 것보다는 박정희의 좌익 경력이 더 큰 이유였습니다. 박정희는 해방 후 일본군 장교였다는 친일반민족행위 전력을 숨기기 위해 친형 박상희를 따라 좌익에 몸을 담았습니다. 당시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의 창설에 참여하며 군대 내 좌익의 핵심 인물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결국 박정희의 좌익 활동이 발각되었고, 박정희는 자신의 구명을 조건으로 군대 내 좌익 조직을 모두 고발하여 군대 내 좌익 제거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좌익 출신 박정희와 좌익 장인(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사위인 김종필이 이끈 5.16 쿠데타를 좌익 군사 쿠데타가 아닌가 의심을 했던 것입니다. 쿠데타 세력이 우리나라의 국시가 반공이라고 내세우며 오버를 했던 것도 다 이런 이유였던 것입니다.
또 위 이야기의 케네디가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까지 미국과 정상회담을 가장 많이 했던 대통령은 박정희와 노태우로 각각 7차례였습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11월 14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였습니다. 오히려 박정희는 이 방문으로 쿠데타를 승인 받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지원 약속이라는 선물까지 받았습니다. 미국의 태도가 바뀐 이유는 이 때 박정희가 먼저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는 아직 미국이 베트남전에 전투병력을 파견하여 대규모로 개입한다는 것이 결정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미국의 파병 압력이란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뜻밖의 제안에 케네디는 박정희와 예정에 없던 정상회담을 또 한번 가졌고, 베트남 파병 제안으로 박정희가 자기를 아주 기분 좋게 해주었다고 칭찬까지 했습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이렇게 좌익 출신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의심을 없애는데 이용되면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1961년 8월 광부와 간호사의 3년간의 노동력을 서독에 파견하고 이들의 노임을 담보로 서독은행에서 지급보증을 맡도록 한다는 상업차관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협상 결과 정부는 발빠르게 상업차관계약을 담보할 노동력을 파견하기 위한 응시자 모집 (광부 5천명 모집에 응시자 4만명, 간호사 2천명 모집에 2만여명이 지원)을 시작하였고, 결국 이때 선발된 사람들 이 독일 이민 1세대가 되었습니다. 즉 이들은 한국이 처음으로 상업차관을 도입한 1억5천만마르크(3천만달러, 위 이야기의 1억 4천만마르크도 사실과 다릅니다.)에 대한 담보였던 것입니다.
1962년 드디어 5천명의 광부들과 2천명의 간호사들이 독일에 가게 되었습니다. 한달 보수로 400마르크에서 700마르크를 받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하여 시간외 근무를 자청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런 와중에도 독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틈틈이 독일어 공부, 각종 기술 익히기에 여가 시간까지 투자하였고 결국은 독일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교포 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위 이야기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다음은 깊은바닷물님의 글 중 이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서독에 광부로 가서 한국출신 간호사랑 결혼하여 그곳에서 살고 있는 어떤 분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서독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지하탄광의 힘든 노동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비하 목소리였다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미개한 나라, 월남전 참여에 대해 백성의 목숨을 돈벌이로 팔아먹는 나라 등의 비난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고. 서독에 갔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상대적으로 더 교육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독에서 바라본 쿠데타 한국은 정말로 화가 치미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박정희가 목숨 걸고 수천 미터 지하에서 석탄을 캐고 있는 자신들의 임금을 담보로 하여 서독정부로부터 돈을 빌린다는데 더 어이없어했지요. 박정희가 서독의 자신들을 방문한다 했을 때 처음에는 똥물이라도 덮어씌우려 했답니다. 그런데 하지만 대사관측의 만류, 압박, 한국에 있는 가족에 대한 걱정 등으로 실행할 수 없었고, 그래도 여기서 우리가 독일인들 앞에 박정희를 환영하고 반가와 해야지 국제 외톨이가 된 조국의 번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 환영하고 어쩌고 했답니다. 그곳에서도 박정희는 인기가 없었지만 육영수 여사는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후에 그들은 어찌되었을까요? 팽 당했습니다. 한국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최대의 엘리트 교민집단이었던 서독의 광부와 간호사들은 박정희에 대해 갈수록 거부감이 심해졌지요. 이때 한국정부는 동백림사건을 만들었고 이 사건과 관계없는 서독의 교민들조차도 이 사건으로 인한 또 한번의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어느 이야기가 더 진실에 가까울까요? 눈물 잘 흘리는 우리 민족이 박정희를 환영하며 눈물 바다를 이루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눈물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조국과 박정희는 무엇을 해주었습니까? 박정희가 표현했다는 말처럼 타국에 동포를 팔아서 경제 개발을 하고, 그들을 외국인 취급하며 참정권도 주지 않았고, 박정희의 3선 개헌, 유신 독재 등으로 부끄러운 조국의 모습에 괴롭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박정희였습니다. 이 때 흘린 박정희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합니다. 다음은 몇 년 전 한 여론 조사에서 박정희가 존경받는 인물 1위에 올랐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썼었던 글입니다.
조선시대 한양의 유명한 건달이었던 홍윤성은 수양대군의 정권탈취에 가담해 공신책봉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정치 깡패입니다. 정권 탈취에 자신의 똘마니들을 동원한 조폭의 보스였던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부터 군사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 깡패들이 활개를 쳤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도 잘 나오죠. 요즘의 '조폭 신드롬'의 시작은 아마 이 드라마에서 조폭들이 너무 멋있게 미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근까지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조폭 영화들도 멋있고 재미있고 인간적인 조폭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원인이 드라마와 영화에만 있을까요?
예전에 도올 김용옥은 '굼발이와 칼재비'란 제목의 칼럼을 썼습니다. 이 칼럼에 인용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란 일본학자는 무사, 다른 말로 야쿠자, 깡패와 군인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군인은 타율 무장집단이고 '칼재비'는 자율 무장집단이다. '칼재비'를 지배하는 건 주종(主從)관계다. 오야붕과 꼬붕의 관계다. 굼발이(군인)를 지배하는 건 군신(君臣)관계다." 마루야마에 따르면 명치유신의 가장 부정적 유산은 일본 군인정신의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칼재비'정신을 군인정신으로 대체시킨 결과로 그 다음 세대(소화시대)에 대두된 일본 군국주의가 그 열매라는 게 마루야마의 지론입니다.
도올은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 군사독재정권의 뿌리는 바로 타락한 일본 군인정신이라는 진단을 내립니다. 결국 군사정권은 일본의 타락한 군인정신을 우리 사회에 이식시켰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칼재비' 야쿠자 문화도 함께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힘에 대한 열광인 '조폭 신드롬'의 출발은 군사 정권의 시작과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 정권을 출발시킨 장본인인 박정희는 일제의 충직한 황군 장교로서 타락한 일본 군인정신의 상징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현재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 박정희라는 여론 조사 결과와 '조폭 신드롬'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과 가치관이 얼마나 썩어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려면...
1. 철저히 나만 위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어라
일제 시대 국민학교 교사였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정말 엽기적인 방법을 썼었습니다. 그것은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 혈서 사건은 당시 만주군관학교에서 박정희를 유명하게 만든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런 초특급 황국신민이 어디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더러운 조센징 중에 이런 진주가 숨어 있었다니”라고 감탄을 하며, 교관과 생도들은 한동안 충격과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 혈서 한 장으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부름을 받고 입학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만주로, 중국으로 떠날 때 박정희는 혈서까지 쓰고 일본군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박정희는 1942년 3월 23일 만주군관학교에서 만계(식민지 출신으로 편성한 계열) 졸업생 240명 가운데 1등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수석 졸업의 특혜로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일본육사 교장 나구모 쥬이치는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
1944년 4월 20일 일본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해 7월 열하성에 주둔하고 있는 만주군 제 8단에 배속되었습니다. 다음은 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입니다.
"다카키 마사오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2. 배신과 변신을 밥먹듯이 하라.
해방 후 친일파들은 살아남기 위해 미군에 빌붙어 우익 행세를 하며 반공주의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좌익과 인연이 있는 경우에는 박정희처럼 공산주의자로 변신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형이었던 박상희가 좌익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국방경비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령으로 근무하던 중, 군대 내의 좌익조직에 가담했다가 여순반란사건 후의 숙군 과정에서 발각되어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군 내부의 거의 모든 좌익 조직을 폭로함으로써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이렇게 박정희는 죽음의 위기에서 다시 잽싸게 반공주의자로 변신을 하여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좌익경력에 의심을 하고 있는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였고, 드디어 1961년 11월 14일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을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와 케네디의 정상회담은 일부 외국 언론에 의해서 종주국 황제의 식민지 총독에 대한 면접시험 같았다는 비아냥까지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하여 친미주의자로 또다시 변신했던 것입니다.
1976년 미국에서 카터 민주당 정부가 탄생하면서 유신 독재가 곪아터지고 있던 박정희 정부를 미국은 좋지 않게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박정희는 자주 국방을 내세우며 핵개발에 나섰고, 미국은 이와 관련하여 박정희 제거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결국 박정희는 생애 마지막 변신인 반미주의자로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3.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박정희는 대단히 권력 지향적인 정치군인이었습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3번이나 기도하였는데 결국 3번째 기도에서 성공하게 됩니다. 첫 번째 기도는 이승만 정권의 첫 임기가 끝나게 되었을 때, 집권 연장을 위한 <부산정치파동> 시기였습니다. 이때 박정희를 포함한 한국 군부의 일부가 주한미군의 지원을 받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결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승만 정권 말기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군부의 일각에서 쿠데타계획이 있었으나 4·19 혁명과 이승만의 하야로 유보됐습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로 장면 정권 성립 후 야기된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61년으로 들어서면서 다소 가라앉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갈 무렵, 박정희 소장 중심 군부세력이 서둘러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게 됐던 것입니다.
3선 개헌 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당선만 시켜주면 다시는 더 출마하지 않겠다고 눈물로 호소했고 국민들은 그 말을 믿고 당선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3선이 되자마자 유신 체제로의 전환과 영구 집권 계획을 구상했고, 남북대화를 핑계로 유신을 단행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6년 임기 대통령이 되고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런 폭정에 저항하는 유신 헌법 개정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헌법에 대한 부정·반대·비방 행위와 그 개정·폐지를 주장하는 일, 개정이나 폐지를 발의·제안·청원하는 행위 일체를 금지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는 정치적 폭거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4. 강한 자에게 충성하라.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마자 미국에 건너가 케네디에게 제안한 것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었습니다. 이때는 아직 미국이 베트남전에 전투병력을 파견하여 대규모로 개입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파병에 대한 미국의 압력이란 것은 있을 수 없는 때였습니다. 박정희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하였고, 이 제안에 케네디는 박정희와 예정에 없던 정상회담을 또 한번 가졌고, 박정희가 자기를 아주 기분 좋게 해주었다고 치하했습니다.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황국군인으로 교육을 받아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그랬는지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여론을 계엄령까지 선포해가며 체결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이 수교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력을 넣은 것도 큰 이유였습니다.
일본은 3억 달러를 10년간 걸쳐서 지불하고, 경제 협력의 명분으로 정부간의 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로 제공하며, 상업 베이스에 의한 무역 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한다는 것이 협정의 골자였습니다. 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독립 축하금'이란 이름으로 무상원조 3억 달러에 35년 식민통치에 따른 모든 보상 문제를 마무리지었습니다. 또 당시 일본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의뢰하자고 하니까 공군 연습장으로 사용하여 폭파시켜 지도상에서 없애자는 발언도 나왔다고 하니 도대체 어느 나라 외교를 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5. 약한 자에게 군림하라
박정희는 집권기간 내내 국민들의 인권을 탄압하고, 반대파와 정적을 고문, 투옥, 제거하였습니다. 장준하, 최종길 의문사, 김대중 납치 사건, 김형욱 실종 등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인혁당 사건 등 간첩으로 모는 것은 기본이었고, 수많은 계엄령과 긴급조치로 인권을 짓밟았습니다. 중앙정보부 등을 통한 감시, 도청, 고문 등 인권 유린이 당연한 시대였습니다. 언제나 사용자 편을 들어 노동자들을 탄압하여 노동 3권이 유명무실하였으며, 빈부격차를 심화시켰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만든 것도 박정희 개발 독재의 산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