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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대 사건 사고들
게시물ID : history_189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B형천재
추천 : 7
조회수 : 1230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12/10 02:36:37
제가 정리한 것은 아니고 요즘 역사와 사고에 관심이 많아져서 좋은 자료가 있기에, 역사공부도 할겸 지난 날들을 생각해보는게 어떨까싶어 가져와 봤습니다.

1946 10.1 대구 폭동사건 대구
 노동평의회가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서 경찰과 충돌하여 발발한 사건. 박헌영과 이강국이 북으로 도망치는 계기가 되었다.  

1948 여수,순천사건사건
 4.3 제주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기 위해서 14연대 좌익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절대우익 반공'을 국시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9 김구 암살
 대한민국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된 사건이다.  

1950 6.25발발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큰 사건이자 사고다. 이 내전으로 무수한 이재민과 난민이 발생하고 가족의 갈갈이 흩어지는 아픔을 맛보았다.  

1953 휴전협정 
남과 북의 이념대립으로 인한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휴전'이라는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그 휴전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분단국이자 휴전국이다. 전쟁이 끝난 나라가 아니다.  

1960 4.19 민주화혁명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로 치부하여 큰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파생발발된 4.19 민주화 혁명은 독단과 독재우익의 이승만 정권을 몰락시키고 이승만을 하야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1 5.16 군사쿠데타
 4.19 이후 세워진 장면의 2공화국은 내각정부라는 민주화 방침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는데 이러한 방침은 난세의 혼란한 사회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상에 반발하여 육군의 박정희가 육사8기들과 합세하여 군대를 이끌고 정권을 장악한 천인공노할 사건

 1964 6.3 사태
 4.19 민주화 혁명보다 그 수는 적지만 전국 대학생들이 궐기한 '한일회담'결사반대를 위해 모인 학생들의 저항운동.

 1968 1.12 사태 
북한에서 김신조 일당이 남파되어 청와대로 향하다가 붙잡힌 사건. 이 사건으로 박정희는 '향토예비군'체제를 운영하게 된다.  

1970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이제 재난의 시작이라 불리우는, 그것도 천재가 아닌 인재라고 불리우는 재난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것도 5.60년대 처럼 이념이라든지 그런 것과는 하등의 문제도 없는 것이다. 박정희가 1969년 서울 판잣집 정리사건과 서울 집중인구의 수도권 분산정책으로 시행한 와우아파트 계획은 1년만에 아파트가 붕괴되는 사건으로 허접한 개발 날림 공사라는 오점을 남겼다.

 1971 대연각 화재사건
 이 해는 무녕왕릉이 발견된 고고학과 역사학적으로 대단히 획기적인 해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박정희의 고도경제성장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고급 21층 호텔인 대연각 1층 커피숍에서 당시 무분별하게 나눠준 프로판 가스가 폭발하고 만것이다. 이 사건으로 163명이 죽고, 건축시 스프링쿨러 설비가 의무화 되었다.  

1971 실미도 사건 
이건 굳이 말 안해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기에 패스. 역시 큰 사건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당시 이 들은 '북괴공작원'이라는 오명으로 수십년을 살아가야 했다. 

 1972 유신 선포 
박정희가 평생 대통령이라는 독재의 길을 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대한민국을 마음대로 바꾸어 버린 바로 그 해다. 우리 어머니, 아버님들이 2-30대이던 바로 그때였다.  

1973 김대중 납치
 이것도 뭐 딱히 말할 것은 없겠다. 박정희가 자신의 정적인 김대중을 죽이기 위해서 납치를 했는데 아주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의 대외국가적 이미지는 추락했다.  

1974 육영수 피살
 퍼스트레이디가 피살당하다니 이건 무슨 경우인가? 박정희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의 첫 표본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박정희를 죽이려다가 잘못 죽은 것이지만서도 말이지.  

1976 판문점 도끼 피살 
공동경비구역에서 작업을 하던 미군 장교 두명이 북한군에게 살해당하고 9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은 이 사건으로 휴전이 깨지고 전쟁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김일성이 '사과'를 하면서 사건은 무마되었고, 이때부터 공동경비구역이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77 이리역 폭파사고 
한국화약[현:한화]이 당국에 보고를 하지 않고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가다가 이리역에서 잠시 정차하던 중 직원이 옆에서 담배를 피고 버린 꽁초에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한 사고. 59명이 죽고 1300명이 부상당하고 부근 주택 5800 채가 박살이 났다. 더구나 그때 한국와 이란의 월드컵 경기가 있던터라 피해가 더욱 극심했다.

 1979 10.26 박정희 피살 
74년의 육영수 피살에 이어서 79년에 박정희가 아끼고 아끼던 후배 김재규의 총탄 앞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독재의 독주는 그렇게 멈춰섰다. 그런데 그 뒷마무리가 ..

 1979 12.12 쿠데타
 박정희가 죽고나서 그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두환이 육사 기수생들을 모아서 정권을 장악한 사건. 5.16 인사들은 이를 '쿠데타'라며 불같이 분노했지만 그대들도 똑같잖은가.

 1980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2.12 이후 전두환 퇴진을 외치는 전국 대학생들의 운동을 전두환은 '계엄령,휴교령'으로 막아선다. 광주 전남대생들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로 들어가려다가 계엄군과 맞붙게 되고 이로인해 시민이 합세하면서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전두환은 계엄군을 증가시키고, 시민군이라 스스로 무장한 광주시민과의 싸움은 광주를 고립화 시켜서 몰살시키는 방향으로 급진화된다. 27일 광주도청을 무차별 진압 학살하여 막을 내린다. 전두환의 명분없는 쿠데타에 대한 저항은 이토록 컸으나 전두환은 3S방침으로 국민의 시선을 딴데로 돌린다. 82년의 통행금지해제와 프로야구개막이 그의 그러한 꼼수중의 하나였다.

 1983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 사건
전두환이 동남아 순회를 위해서 처음으로 찾은 버마[현:미얀마]에서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러 갔다가 대형폭파사건으로 목숨을 구한 사건. 다행히도(불행인가?) 전두환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폭파하여 전두환은 살았으나 당시 부총리 이하 수많은 취재기자들이 모두 죽은 대형 참사. 전두환은 순방을 취소하여 급거 귀국하였고 버마는 '북한'의 소행이라고 UN에 보고하고 북한과 외교를 단절하였다.  

1983 소련, KAL 격추 사건
 소련이 우리나라 KAL 항공이 영공을 침공했다는이유만으로 전투기로 요격하여 격추시킨 사고. 전투기도 아니고 정찰기도 아닌 민간 항공기를 추격했다는 것으로 국제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269명 사망. 

 1987 오대양집단자살사건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주식회사 오대양의 대표이자 교주인 박순자가 신도 32명과 함께 오대양 구내식당 천장에서 집단으로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밝혀지지 않고 흐지부지 마무리가 된 찜찜한 사건. 

 1987 KAL기 폭파사건
 11월에 느닷없이 인도양 상공에서 칼기가 실종되었다. 현지 조사결과 공중폭파 가능성을 시사했으며 이를 정부는 '북한의 88올림픽 방해 책동'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대선 직전에 칼기폭파범으로 '하치마 아유미[김현희]'를 체포, 후송했다. 여전히 의문이 남는 사건 중의 하나. 115명 사망.  

1988 지강헌 사건
 서울 올림픽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발생한 탈주, 인질극.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던 중에 지강헌을 비롯한 12명의 미결수가 탈주하여 서울에서 9일동안 가정집에서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한 사건. 탈주범 둘은 자살하고 지강헌은 사살되었다. 이때 지강헌은  '돈이 있는 자는 큰 죄를 지어도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을 하여 심지어는 죄가 없는 것으로도 할 수가 있지만, 돈이 없는 자들은 조그만 죄를 지어도 바로 잡혀가서 감옥을 살거나 남의 죄까지 뒤집어써서 큰 죄인으로 몰리기도 한다'  고 말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은 이후 기자들이 '한문'으로 고사성어화 만든 것이다. 기자들인지 아니면 식자층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한문'이 유식한것인줄 아는 사람들이겠지.

 1992 신행주대교 건설중 붕괴 
이제부터 시작이다. '건축물'의 본격적인 붕괴가 시작된 시점이 바로 이때지 싶다. 다행히도 이때는 건설중에 붕괴가 되었기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왠지 그 징조가 예사롭지 않다.   

1993 육해공에서 모든 사건이 일어난 해  
1] 구포 무궁화호 전복 사고 서울에서 출발한 무궁화호가 구포에서 '한국전력'이 지하 전선 공사로 지반을 약화시키는 바람에 지반이 무너져 열차가 전복하여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2] 아시아나 항공 해남 추락사고 아시아나 항공기가 목포공항을 향해 가다가 해남 앞골짜기에 추락한 사고. 기장과 승객 66명이 전부 사망한 국내 항공기 사고사상 최대의 참사 

 3] 서해 페리호 사고 전북 부안에서 페리호가 승선 인원의 2배를 싣고서 항해하다가 침몰한 사고로 사망자가 292명.  

4] 우암 상가 아파트 붕괴사고 본래 지하1층, 지상3층짜리 건물이 3차례의 설계 변경과 4층에 옥탑까지 증축을 하는 바람에 건물 하중의 문제를 외면해버려 발생한 사고로 사망 28 / 부상 48, 구조된 인명 176명이었다.

 1994 성수대교 붕괴 
내가 94군번이다. 훈련소 마지막주 심야행군을 하고 아침에 돌아오니 조교가 집에다 안부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모두들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성수대교 붕괴라는 어처구니 없는 참사라니. 그것도 출근 시간에 무너지다니. 어찌 다리가 무너질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성수대교는 새발의 피란 것을 나중에 알 수 있을 것이다.

 1994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 
가스 계량기 점검중에 가스가 누출되었고 이를 모른채 담뱃불을 붙이다가 가스가 폭발하여 12명이 사망하고, 170명이 다치고 건물 145동이 파괴된 아찔한 사고. 왜 아찔한 사고야? 이거 대형 참사 아냐하겠지만... 더 큰 사고가 기다리고 있다.

 1995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 
성수대교라는 다리 무너진 것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은지 1년도 채되지 않아 백화점이 무너지는 대략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외국에 나갔던 한국인들은 이 기사를 보고서 '농담하냐?'하면서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을정도였으니. 자그마치 507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을 당하는 건국이후 최대 규모의 사고로 기록되었다.  

1995 대구 가스 폭발 사고 
아현동 가스 발생한지 1년도 안되서 발생한 또하나의 가스 사고. 대구 백화점 신축공사를 위해서 천공작업을 하다가 가스관을 건드려 가스가 새어서 지하철 공사장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는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이로인해 사망 102명, 부상 220명, 차량 150대 파손이라는 경이적인 가스 사고 참사를 낸다.

 1995 씨프린스 원유유출 사고 
전남 여천에 키프로스 국적의 14만톤 씨프린스 유조선이 파도와 태풍속에서 무리하게 항해하다가 침몰한 사고다. 지금도 씨프린스 원유가 떠다니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2007년의 태안원유사고시 원유가 1만 2천톤 유출되었으니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알수 있다.

 1996 북한 잠수함 무장간첩 침투
 잠잠하던 북한이 느닷없이 김일성 죽고나서 동해안으로 간첩을 보냈다. 이로 인해 국가에는 비상이 걸렸고 무장간첩과 싸우던 중 우리 병사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1997 KAL 괌 추락 사고
 IMF 외환위기를 당한 해이다. 그리고 이때에 또다시 항공사고가 발생했다. 229명 사망.  

1999 씨랜드 화재 사고 
놀이동산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에 느닷없이 화재가 발생하여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4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수련원 건물은 컨테이너를 모아 붙인 건물로서 수련원으로서 허가가 날 수 없는 형태였다고 해서 문제가 많았다.  

1999 인현 호프집 화재 사고 
호프집 건물 지하에서 페인트 작업을 하던 아르바이트생 2명이 시나를 가지고 불장난을 하다가 불이 났다. 지하에는 페인트 작업으로 인화성 증기가 가득차있어서 불이 쉽게 번졌으며 호프집에서는 '술값'을 받으려는 주인이 문을 잠그고 손님들의 도주를 막아서 인명피해를 증가시켰다. 사망 57명, 부상 80명.

 2002 여중생 미군 장갑차 압사사건 
월드컵 열기가 한창일때 발생한 사건. 그로인해 초기에는 몰랐다가 나중에 발각되어서 반미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처음으로 평화적인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2003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대구의 시민이 지하철을 타고있다가 객차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순식간에 지하철 객차를 뒤덮었으며 동시에 반대편에 도착한 지하철에도 옮겨붙어 화재가 더욱 확산되었다. 사망 192명, 부상 151명. 

 2004 김선일 이라크 피살 사건 
한국 군납업체 직원인 김선일씨가 이라크 무장단체 알 타우히드 알 지하드에 납치되어 피살된 사건. 더구나 동영상으로 녹화되어 방송이 되어 모든 국민을 분노에 떨게 했다. 그들은 이라크에서 한국군 파병 철회와 주둔 한국군 철군을 요구했다.  

2005 황우석 사태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연구로 전 세계에 그 유명세를 떨쳤으나 이후 발생된 갖가지 트러블과 논문의 거짓 등으로 판명되어 전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한 사건. 한 과학자의 성공에 따른 압박감과 결과물을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  

2007 탈레반 납치사건
 샘물교회 신도 20여명이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를 목적으로 나갔다가 이슬람 무장단체인 탈레반에게 억류된 사건을 말한다. 2명이 살해당하고 이후 무사 귀환하였다.  

2007 태안 원유 유출 사고
 예인선에 의해 예인중이던 부선이 정박중이던 유조선과 충돌하여 원유가 유출된 사고.

 2007 소말리아 피랍 사건
 원양어선 한국의 마부노호가 소말리아에서 해적에 피랍된 사건이다. 피랍된지 70일이 지나도록 한국정부가 무반응으로 대응하여 해적들이 전에 납치했었던 동원호에 연락할 정도였다. 정부는 '해적과의 타협은 없다'로 일관했고 이로인해 국민의 분노를 샀다. 선원들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속에서 떨다가 174일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2008 숭례문 전소 
70대 노인이 자신의 땅 사건을 나라가 제대로 해결해주지 않자 이에 대한 분노로 국보 1호 남대문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 노인의 어처구니 없는 이기심이 대한민국 600년의 역사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2008년 이후로는 가장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우리함께 생각을 해Boa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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