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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허망에 관하여
내 마음을 열
열쇠 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여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 부스러기를 좀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도 하는
이런 일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한강, 첫새벽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 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김영태, 과꽃
과꽃이 무슨
기억처럼 피어 있지
누구나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가 가지
조금 울다가 가버리지
옛날같이 언제나 옛날에는
빈 하늘 한 장이 높이 걸려 있었지
장철문, 갓등 아래
저 중에는 하루만 살고 가는 것들
그냥
아하, 이게 사는 거구나 하고 가는 것들
사는 게 그저
알에서 무덤으로 이사 가는 것인
그런 것들
불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지럽게 원을 그리는
도무지 뭐랄 수도 없는 것들
이 마음에는 한순간 왔다 가는 것들
너무 빨라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그 몸을 알리는 것들
안팎의 경계에서
그저 잉잉거리다 마는 것들
스러진 뒤에야
그 잔상이나 남기고 가는
그마저 거두어지는
양채영, 그 나뭇가지에
내 언젠가
몸도 마음도 정결타 믿던 때에
어느 산천에 난
사려 깊은 나무 한 그루
이 마당가에 심었다
전쟁이 터지고
모든 것이 터지고
그 나무는 내게서
멀리 떠나 버렸다
싸움에도 지치고
별도 지고
이젠 남을 용서해 줄까
망설이는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친다
어느 날 마당가에 심었던
커다란 나뭇잎이었다
아직 나무에는
새가 남아 울고
그때 그 산천에서 보았던
구름 한 덩이가
그 나뭇가지에 얹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