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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나를 지우고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김영석, 등불 곁 벌레 하나
옛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풀 나무나 꽃만 그리지 않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어느 구석일망정
작은 벌레 하나가
그 속에서 조용히 살게 하는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오늘은 내 홀로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
그 생각의 등불 곁에
작은 벌레 하나를 숨 쉬게 하여
그 가느다란 더듬이로
먼 세상을 조용히 그려 본다
이승훈, 가고 싶어 간다
그대 없으면 메모 한 장
남기고 온다
메모도 필요 없다
그대 집 마당에 내리던 햇살
그대 집 마당에 불던 바람만
알면 된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가고 싶어 간다
안현미, 와유(臥遊)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박남준, 이름 부르는 일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