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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목마르다
우물이 깊을수록
두레박의 끈은 길다
심한 목마름에
한 두레박의 물을 길어 올려도
목마름을 위해서는
한 모금의 물만 필요할 뿐
하늘의 구름 사이
밝은 달이 우물에 빠지면
그때마다 나는 급히 목마르다
서둘러 두레박을 내리지만
끈이 긴 두레박의 물은
쉽게 내 입술에 닿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가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들려주어도, 쉽게
나의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다
차라리 깊이 빠져드는
한 덩이 달이 되고 싶다
김영재, 내 안의 당신
강을 건넜으면 나룻배를 버려야 하듯
당신을 만났으니 나를 버려야 했습니다
내 안에 자리한 당신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허형만, 참 좋은 곳
이곳은 풀벌레 소리가
어둠을 물어 나른다
한낮 소나기
몇 차례 다녀가신
사이사이 맑은 이파리가
햇살에 반짝 빛나기도 하지만
때가 이르러
어둠이 도둑고양이처럼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기어들라치면
풀벌레 소리들이
하나 둘 순식간에 달라들어 물어간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평화라든가 적요라든가 명상 같은
그런 어려운 말 대신
내가 나인 줄도 모르고
그냥 거닐기 참 좋은 곳이다
문덕수, 선물(膳物)
누가 몰래 두고 간 포장(包裝)
달빛의 초점(焦點)이다
뜻밖에도 숲속에서 마주친
당신의 놀란 얼굴 같구나
무엇이 들었을까
설레임은 꽃의 꿈으로 익어
나의 빈 손은 떨린다
한 겹 한 겹 풀면서 나는 늙어 가나니
마치 한 아름의 저주(詛呪)인 듯
이면우,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무언가 용서를 청해야 할 저녁이 있다
맑은 물 한 대야 그 발밑에 놓아
무릎 꿇고 누군가의 발을 씻겨줘야 할 저녁이 있다
흰 발과 떨리는 손의 물살 울림에 실어
나지막이, 무언가 고백해야 할 어떤 저녁이 있다
그러나 그 저녁이 다 가도록
나는 첫 한마디를 시작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발을 차고 맑은 물로 씻어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