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전에 인용한 척탄병 쿠아녜 (Coignet) 회고록에서 인용한 사건입니다만, 이번에 땅콩 부사장 사건을 보고 생각이 나서 다시 인용합니다.
1800년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눈 덮힌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기 위해서, 무거운 대포는 다 분해하여 부품별로 운송해야 했습니다. 다만 청동제의 포신 그 자체는 더 이상 분해가 안 되었으므로 병사들이 들고가거나 나귀에 싣고 가기엔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그 속을 파내어 카누처럼 만들고, 그 속에 대포 포신을 넣고 노새로 끌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힘겹게 알프스를 오르던 노새들은 얼마 못 가서 지쳐 쓰러져 버렸으므로, 결국은 덩치 좋은 척탄병 중대의 병사들이 노새를 대신하여 이 포신 통나무 썰매를 끌게 되었습니다. 당시 쿠아녜는 척탄병 중대의 신병으로서, 대포 포신을 끌고 올라가는 그 20명 조의 일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이 포신 썰매의 책임자는 그 대포를 책임지는 포병장(gunner)이었습니다. 이 계급은 보통 하사 혹은 상병 (corporal) 정도가 맡는 직책이었지요. 이 오르막길은 정말로 험악한 여정이었습니다. 길은 거친 얼음으로 뒤덮혀 있어 빈약한 군화 바닥을 찢어 놓았고, 통나무 썰매가 자주 미끄러졌기 때문에 포병장은 자주 '정지!'를 명하고 포신을 다시 썰매에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얼음이 아닌 만년설 지대로 접어들자, 통나무 썰매가 좀더 수월하게 미끄러지며 운송이 쉬워졌습니다. 그러자 사단장이던 샹발락 (Chambarlhac) 장군이 다가와 이 수송조 병사들에게 더 빨리 움직일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건 지친 병사들에게 무리한 지시였고, 또 자칫하면 대포가 계속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일개 사병인 포병장이 샹발락에게 대들었습니다.
"이 대포는 내 책임 소관입니다. 저 개인의 책임이라구요. 장군님께서는 그냥 가던 길 가세요. 이 척탄병들은 지금 당장은 장군님이 아니라 제 지휘권 하에 있습니다. 명령은 제 몫입니다."
이런 건방진 말대답에 대해 발끈하여 샹발락이 포병장에게 다가가자, 포병장은 오히려 더 강경하게 나갑니다.
"당장 우리 앞에서 비켜나지 않으면 이 빠루 (crowbar, 지렛대가 맞는 표현있게지만 빠루가 더 실감 나는군요)로 갈겨 버릴 겁니다. 가시던 길 가시라구요, 아니면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릴테니까 !"
(백마를 타고 폼 잡는 나폴레옹 뒤에는 저렇게 힘겹게 대포를 끌고 올라가는 병사들의 피땀이 있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알프스를 넘을 때, 나폴레옹은 백마가 아닌 나귀를 타고 있었고, 병사들은 저렇게 바퀴 달린 포가가 아니라 통나무 썰매에 실린 대포를 끌고 가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nasica/6862564 참조 )
샹발락 장군은 결국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양반이 나중에 그 건방진 포병장을 찾아내어 무슨 보복 조치를 했는지는 기록이 없는데, 사실 별다른 기회를 못 찾았을 겁니다. 그는 마렝고 전투 때 치열한 전투에 겁을 먹고 도주하는 바람에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거든요. (척탄병 쿠아녜의 모험 http://blog.daum.net/nasica/6862502 참조)
이렇게 놀라운 하극상이 판치는 군대가 과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 예, 그것도 아주 대승리를 거둡니다. 심지어 저 샹발락 장군이라는 사람은 병사들의 집단 행동에 의해 지휘권을 빼앗기고 결국 쫓겨났지요.
이는 당시 프랑스군 일개 사병들이 가지고 있던 책임의식, 주인의식과도 상관이 있습니다. 프로이센 군이나 러시아 군에서라면 그냥 '장교 나으리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라는 것 외에는 일반 사병들이 가진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프랑스 군은 달랐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한 의식이 있었고, 자신보다 더 상급자라고 할 지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명령에 대해서는 대들 정도로 기백이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언제든지 자신들도 전공만 세운다면 장교가 될 수도 있고 장군이 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왕후장상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꼭 나폴레옹이 지휘를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번에 땅콩 회항 사건에서 가장 큰 희생자는 마카다미아가 뒤집어 써야 할 오욕을 다 뒤집어 쓴 땅콩이라는 농담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당연히 그 사무장과 스튜어디스가 가장 큰 희생자가 될 것입니다. 아직 정식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해본 경험에서 미리 짐작하건대, 또다른 희생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바로 기장입니다.
일단 비행기에 오르면, 대통령이건 이건희건 모두 기장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즉 기장이 총책임자가 됩니다. 총책임자라는 것은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 뭔가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그 기장이 정말 매뉴얼을 따라 결정을 했다면, 일등석에서 땅콩 부사장이건 박근혜건 승객이 승무원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며 난동을 부릴 때 즉각 공항 경찰에 알리고 비행기에서 내쫓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장이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사무장을 내리게 해야 했던 것은 누구나 다 이해할 만한 일이기는 했지요. 그러나 그 땅콩 회항이 불합리한 것이었다면, 그 책임은 땅콩 부사장이 아니라 그 기장이 지게 됩니다. 그 기장에게는 대형 여객기의 운항과 안전을 책임진 책임자라는 신분도 있고 재벌기업에서 돈을 받는 고용인 신분도 있는 것인데, 결정적인 순간 그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지요. 아무튼 회항에 문제가 있었다면, 기장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원래 기업에 바지 사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도 유사시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기장이 잘못 했다는 것이냐 ?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장이 매뉴얼대로 행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고, 기장이 총책임자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든 한국 기업 문화와 사회적 특성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결함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흔히 중국이 미국을 뛰어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들 합니다. 저는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동양적 또는 유교적 가치관이라고 포장되는 계급 의식과 특권 의식, 비합리적인 체념/순종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그 사회는 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대한항공이나 조씨 일가가 입을 피해가 있을까요 ? 전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일단 저만 하더라도 대한항공 마일리지가 부부 합산으로 엄청 많이 쌓여 있는데, 이번 사건으로 제가 아무리 분개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일리지를 버리고 다른 항공사를 이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모든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이것이 바로 거대 재벌에 의해 휘둘리는 사회의 폐단입니다. 재벌이 우리나라에 기여한 바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끼친 해악도 많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끼칠 해악도 많고요. 잘못된 것을 찾아내어 수정하자고 하는 것은 종북도 아니고 반기업 정서도 아닙니다.
이번 사건이 단순히 '가진 자들에 대한 분풀이'로 끝나지 않고, 우리 사회가 '반듯한' 사회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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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와이프가 웹서핑을 하다가 한마디 하네요. "네이버에서는 정말 땅콩 부사장 관련 폭언 폭행 뉴스가 전면에 나오지 않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
네이버는 언론사가 아닙니다. 그냥 돈을 벌기 위해 만든 포털 기업일 뿐이고, 대한항공 같은 재벌 기업들에게 광고를 팔아 먹고 사는 회사입니다. 언론사로서의 의무나 정의감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무를 가진 소위 언론사라는 것들도 돈을 벌어야 먹고 사는데, 돈을 벌려면 재벌들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습니다. 건전한 사회는 포털이나 언론사, 손석희가 만들어주나요 ?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 개개인이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포기할 수 없듯이, 미약한 국민 개개인도 돈 앞에서 쩔쩔 맬 수 밖에 없는데, 돈을 가장 많이 가진 이들이 재벌이니, 뭐 어려운 이야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