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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의령 우범곤순경 총기난사 살인사건
게시물ID : panic_928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elody♪
추천 : 20
조회수 : 18457회
댓글수 : 32개
등록시간 : 2017/03/13 11: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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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은… 악마의 밤이었다.
 
더 이상 “인간의 탈을 쓰지 않기로 작심한 악마가 피와 공포로 마을을 도륙한 밤”이었다. 정녕코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더욱 경찰관일 수가 없었다. 그가 정말 사람이고, 그가 정말 경찰이라면,
 
그토록 무자비하게, 그토록 교활하게, 사람들을 차근차근 죽여 나갈 수 있었을까.
 
하루밤새 무려 56명을, 처형하듯 떼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었을까.
 
 지금으로부터 꼭 31년 전, 1982년 4월26일 밤의 일이다. 경남 의령의 산골마을 궁유면에는 그날 봄비가 궁상맞게 흩뿌리고 있었다.
 
 밤 9시 반경부터 이 희대의 살인극은 시작됐다. “마을을 지키고 주민을 보살펴야 할” 지서 순경이 무시무시한 살인마로 돌변했다.
 
 의령경찰서 궁유지서 소속 우범곤 순경(27). 그는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4개 산골마을을 돌며 수류탄을 까 던지고 카빈 소총을 난사해
 
 무려 90여명을 살상한 뒤 자신도 자폭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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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학살 역사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불과 “대여섯 시간 짧은 사이 그 많은 사람을 죽인 것”도 그렇고,
 
 “경찰관이 살인마로 돌변해 아무 잘못이 없는 민간인에게 수류탄과 카빈총 세례를 퍼부은 것”도 그렇다. 뿐인가.
 
 그가 난동을 시작해 자폭하기까지 사실상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나중에 경찰은 책임을 회피하려 “상황기록을 파기”했는가 하면
 
 신군부 출신 대통령(전두환)의 청와대는 민심이반을 두려워해 언론 보도를 통제했다.
 
 그 엄청난 사건이 “불과 1주일 만에 신문지면에서 사라진 것도 기록이라면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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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참사의 사소한 발단
 
 어처구니없는 참변의 발단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 순경은 이날 “내연의 처 전씨(25)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술을 마셨다.
 
 오후 6시부터 지서 야간근무자로 지정된 그가 야근에 대비해 “집에서 낮잠을 잘 때 파리가 날아와 가슴께에 붙었다.
 
 전씨가 그걸 잡겠다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쳤고 이에 우순경은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일이 발단이 돼 둘은 그간의 감정까지 폭발시키며 심하게 다퉜다. 끝내 화를 못 참고 오후 4시쯤 집을 뛰쳐나간
 
 우 순경은 근처 가게에 들어가 술을 퍼마셨다.
 
저녁 7시 반. 우 순경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더니 “다짜고짜 세게 처의 뺨을 때려 코피를 쏟게 하더니 말리던 처의
 
 친척언니까지 폭행하며 집안 가구를 내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웃사람들이 그걸 보고 “어떻게 저런 망나니와 함께 사느냐”,
 
 “저런 인간이 경찰이 맞느냐”며 처를 동정하자 또 집을 나와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지서로 돌아갔다.
 
 근무시간인데도 지서에 앉아 근무한 게 아니라 술집과 집, 지서를 들락거리며 화풀이를 하러다닌 셈이었다.
 
 그러던 밤 9시 반 경. 내연의 처를 폭행할 때 말리다 함께 뺨을 맞은 친척언니의 아들이 지서로 우를 찾아왔다.
 
 그리고 “경찰이면 다냐? 왜 아무나 때리느냐?”고 따졌다. 이에 우는 시쳇말로 “꼭지가 돌았던”것 같다.
 
 느닷없이 “그래, 다 죽인다!”고 소리치며 미친 듯 지서와 예비군무기고로 달려가 카빈 소총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부터 조용한 산골마을은 끔찍한 ‘인간 사냥터’로 변해버렸다.
 
 
 
 그는 마침 지서 앞을 지나던 20대 남자를 조준 사살하더니
 
 구멍가게에 수류탄 2발을 던졌다. 다행히 수류탄은 불발됐다. 그러자 그는 미친 사람처럼 우체국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여기서 당직근무 중이던 교환원 전은숙양(21세)등 2명을 카빈총을 난사해 살해했다. 또 숙직실에서 자고 있던 집배원 전종석씨(36)
 
 에게까지 총을 쏘았다. 특히 우체국에서 숙직하다 참변을 당한 집배원 전종석씨는 부인마저 집에서 변을 당해 장녀 순자양(16)
 
 장남 일도(11) 차남 이구군(7) 등 3남매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그가 우체국을 사실상 첫 타깃으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 마을 밖으로 나가는 통신선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 산골마을엔 수동식 전화기 밖에 없어 우체국 교환원이 전화선을 연결해줘야만 전화통화가 가능했다.
 
 당연히 “이곳을 마비시키면 마을 내부는 물론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깜깜 먹통이 되는” 거였다.
 
 바로 여기서 그의 악마성이 드러난다. 술에 취했다고 하지만 “통신부터 단절하는 등 정신이 멀쩡한 사람처럼 상황을 판단하며”
 
 사람들을 차근차근 죽여 나갔다. “밖에 상황을 알릴 수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게 만들어놓고” 불 켜진 집을 찾아가 총질을 해댔다.
 
 밤새도록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날벼락을 맞은 주민들은 마치 전쟁을 피해 피난하는것처럼 산중턱이나 바위틈에서 하룻밤을 보내야했으며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총소리에 전율을 감추지 못했다.
 
 이마을 전용섭씨(45)는 "친구집에서 놀고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나 뛰어나와보니 우순경이 술에취해 미친듯이 날뛰면서 총을 마구 쏘고있었다"
 
 면서 총소리에 놀라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 들판으로 대피해 보리밭에 숨어있다가 날이 새자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이 숨져있고 딸이
 
 총에맞아 신음중이었다고 통곡했다.
 
그의 살인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다. 생후 한두 달밖에 안된 영아부터 70노인까지 눈에 띄기만 하면 총을 갈겼다.
 
 
성격이 괴팍하고 열등의식에 찬 심리
 
다시 그의 살인행각을 복기해보자. 밤 9시40분께 토곡리에서 첫 살인을 하고 우체국에서 3명을 더 죽인 이 악마는 밤 10시경 300m
 
 위쪽 압곡리 매실마을로 달려갔다. 내연의 처 전 씨와 그 가족 친척들이 사는 곳이었다. 여기서 악마는 전 씨에게 복부관통상을 입히고
 
  우체국에서 이미 사살한 집배원 부인 등 6명을 쏴 죽였다. 그는 양손에 카빈 한 자루씩을 들고, 입에는 담배를 꼬나문 채 집에 들어와
 
 “여기 전 양 있나?”고 고함을 질렀다. 방문이 열리자 그는 “이 x년들, 다 죽인다!”고 외치며 양손 카빈을 연발로 난사했다. 그리고는
 
 수류탄을 까 마당 한복판에 던지고는 쏜살같이 집을 나갔다.
 
 내연의 처 전 씨는 이튿날 병원에 옮겨져 의식이 있는 동안 짧은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파리를 잡다 부부싸움이 일어났고,
 
 그것 때문에 우순경이 술을 마신 뒤 총질을 해댔다”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는 특히 자신과 우순경의 동거 경위를 밝히며
 
 “그는 성격이 괴팍하고 말씨가 거친데다 집안이 가난해 늘 열등의식에 젖어있었다. 거기다 경찰이 결혼식도 안올리고 동거부터 한다고
 
 수군거리는 걸 못마땅해 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사망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집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놓았기에 나중에 우의 범행동기와 심리를 유추할 수 있게 됐다.
 
  처 일가족을 다 죽였다고 생각한 우는 다시 압곡리 남쪽으로 600m 떨어진 운계리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한 중학생을 만나 함께 운계리에
 
  도착한 그는 “장터입구 가게에서 콜라 1병을 사 마시고는 바로 동행한 학생을 사살”했다. 순간적인 총질에 놀라 가게주인 가족이 허둥대자
 
 이번에는 그들을 향해 총을 갈겼다. 마을입구 쪽에서 ‘타당 탕탕’ 총소리가 나자 안쪽 마을에서는 “무슨 일인가 싶어 불을 켜고”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와 기웃거렸다.
 
 이렇게 불을 켠 집은 모두 악마의 손길에 소리 한번 못 지르고 변을 당했다. 우는 장터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며 “간첩이 나왔다.
 
 다 나와 보시요!”라고 소리치거나 “이 더러운 세상. 싹 다 죽일 거다.”, “순경 못해먹겠다”는 등 혼잣말을 웅얼웅얼 지껄이며 총질을 했다.
 
 어떤 때는 씩 웃으면서 총을 겨누었다. 아, 이게 정녕 인간이고, 이게 정녕 경찰이란 말인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도륙하는 악마의
 
 광란에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갔다.
 
 
초상집에서 이어진 대학살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 양손에 카빈을 들고 허리춤엔 수류탄을 매단 경찰 복장 악마가 큰길가부터 차근차근 사람들을 죽이면서
 
 쳐들어오는 걸 상상해보라. 피의 공포가 빗줄기처럼 사람들 등골로 흘러내렸다. “살아야겠다.”거나 “도망가자.” 이런 이성적 생각을 하고
 
 말고도 없이 사람들은 무작정 뛰고 꽁꽁 숨었다. 밭두렁, 산등성이에 납작 엎드려 추적대는 비를 맞으면서 그저 들키지만 말고 이 밤의
 
 살육이 어서 끝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런데도 연발총성과 수류탄 폭음은 지긋지긋하게 그 밤을 흔들었다.
 
 운계리에서만 18명을 사살한 우는 산길로 2km 떨어진 평촌리에 자정 무렵 도착했다. 그는 마을사람이 많이 모여 있던 문천군 씨의 초상집에
 
 들어와 조위금 3천원까지 내고 술상을 받았다. 처음 그가 카빈 두 자루를 들고 초상집에 들어오자 사람들이 “이 오밤중에 웬일이냐”고
 
 물었고 우는 태연스레 “간첩이 나와 비상이 걸렸다. 밖에 안순경이 있다”며 카빈 한 자루를 툭툭 쳤다. 마치 “총 두 자루를 지녔지만
 
 한 자루는 동료의 것을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투였다. 술상 앞에서 그는 “봉급도 쥐꼬리 같고, 총각이라고 차별도 하고
 
 이놈의 순경 짓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푸념도 했다.
 
 대학살은 바로 그 순간 또 이어졌다. 술상 옆의 한 주민이 카빈을 툭 치며 농담처럼 “실탄도 없는 빈 총을 뭐 하러 가지고 다니나”고 하자
 
 우는 그를 노려보더니 총을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농을 던진 사람과 그 옆의 이장을 쏴 죽였다. 상황 판단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우는 콩 볶듯 총을 갈겼다. 겨우 정신 차린 사람들이 후다닥 상을 박차고 일어나며 “순경이 사람을 쏜다!”며
 
 도망치는 뒤를 향해서도 총을 쏘았다. 일부 산속으로 도망간 엎드린 사람들은 초상집에서 연속해서 타당타당 총 쏘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고 저래선 안 되는데, 총을 뺏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오금이 저려 차마 일어서지를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다.
 
 우는 이 초상집 근처에서만 모두 24명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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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는 시신의 사진이 있으므로 원치 않으시는 분께   서는 스크롤을 내리지 않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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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이렇게 악마가 온 마을을 휘저을 때 군경은 뭘 하고 있었을까. 그날 밤은 마을마다 반상회가 열렸다.
 
 그런데 지서 주임과 차석은 “온천욕을 즐기러” 아예 궁유를 떠나가 있었다. 밤 10시 5분, 반상회 참석차 궁유면에 온 군청민방위과장이
 
 총소리를 듣고 신고하려 했지만 교환양들이 다 죽은 뒤라 전화가 안 되자 이웃 면으로 차를 몰고 가 의령경찰서에 신고했다.
 
 령서 상황실은 기동타격대에 비상을 걸었는데 “타격대에 지급할 무기를 넣어둔 무기고 열쇠를 찾지 못해 30~40분을 허비”했다.
 
 경찰서는 또 궁유 인근 다른 지서에도 출동 명령을 내렸으나 쉽게 소집이 되지 않았다.
 
 그래 궁유지서가 있는 토곡리에 맨 처음 경찰이 당도한 시간이 밤 11시 40~50분께였다. 이때 우는 토곡, 압곡, 운계리에서
 
 이미 28명을 죽이고 평촌리 초상집에 가 있었다. 그 무렵 도경도 상황 보고를 받고 “우 순경을 사살해도 좋다”는 진압 명령을 내렸으나
 
 그를 보지도 못하고 뒤늦게 현장을 밟아와 “즐비한 시체와 탄피를 보고 경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타격대와 다른 지서에서
 
 차출돼온 경찰관들은 오히려 우와 마주쳐 총격전이라도 벌어질 걸 두려워하는 듯 몸을 사리며 적극 진압을 꺼리는 모습이었다.
 
 새벽 2~3시경, 우는 산속에 숨어있다 다시 평촌리로 내려왔다. 평소 알던 서모 씨 술집에 들어가 가족 4명을 인질로 잡고 있던 그는 동이
 
 트기 전에 수류탄 2발을 터트려 인질들과 함께 폭사했다. 결국 “아무도 그가 죽기 전까지 악마적 발광을 막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그가 자폭하기 직전까지도 서씨 가족들에게 “무장공비가 나와 작전 중”이라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꾸며대 인질로 잡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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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전체가 장례식이 되어 버린 그날>
 
 
 4월27일 오전, 사건이 처음 보도되자 말 그대로 “온 국민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경찰이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을 100명 가까이 죽였다는
 
 (처음에는 62명부터 73명까지 사망했다는 등 피해자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얘기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속보가 속속 나오면서
 
 우가 청와대 경비대에 근무하다 의령서 궁유지서로 좌천돼간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 측은 그가 “청와대에 근무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웠다. 언론에 ‘협조’를 요청했고, 당시 신문들은 “그가 서울의 특수근무지에서 일했다”고 얼버무려 보도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서정화가 자진 사임하고, 후임으로 노태우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된다.
 
 한편 당시 의령경찰서장은 직무유기죄로 기소되었으나 법원은 주관적으로 직무를 버린다는 인식이 없고 객관적으로는 직무 또는 직장을
 
 벗어나는 행위가 없다고 보고 무죄판결을 선고한다.
 
 당시 수사본부는 범인 우범곤순경의 수법이 너무 잔인해 일반인과 뇌조직이 어떻게 다른지를 가려내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시신을 보내 뇌세포 검사를 하려 했으나 검사가 불가능해 이를 포기한다.
 
 우순경 사건 직후 전두환 정권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은 피해자 보상이었으며
 
 군사정군 초기 민심이탈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사건발생 닷새만인 5월1일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를 위원장으로 한
 
 국가배상심의위원회는 사망자 1인당 최고 1900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전달한다.
 
 배상법에 따르면 사망자 가운데 60살 이상 노약자의 배상금은 835,000원으로 결정됐으나, 배상위는 이 금액이 너무 적다며
 
 최하금액을 300만원으로 일괄조정해 지급해따.
 
 또 배상금과 별도로 사망자 장례비 30만원과 죄위금 600만원을 유족에게 건넸으며 이런저런 명목으로 유족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사망자 1명당 최고 3200만원에 육박했다.  일가족 6명을 잃은 박군(19)의 경우 가족 사망 보상금으로 1웍원이 넘는 돈을 받게된다.
 
 당신 순경 초임자(군필자)의 한달치 급여가 133,000원이던 시절이니 상당한 액수의 보상이라 볼수있다.
 
 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사망자 배상금 지급일에 맞춰 현장을 찾아가 103억 규모의 "궁류마을장기개발계획)에 서명했으며
 
 이 계획에는 궁류면 벽계리의 저수지에 둑을 새로 쌓고, 궁류에서 인근 시.군으로 연결되는 산골길을 모두 포장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당시 정권은 이외에도 사망자 및 부상자 가족의 학비.의료비 면제, 예비군 훈련연기 등 생각할수 있는 거의 모든 주민지원방안을
 
 내놓았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도 개인 자격으로 2억3900만원의 유가족 성금을 내놓았다. 이는 전두환 군사정권 초기시절의 시끄러운
 
 잡음을 하루빨리 가라앉히기 위한 발빠른 행동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사건의 뒷이야기조차 5월 초부터는 제대로 보도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생기를 되찾는 비극의 마을”, “경찰 불신, 있을 수 없다”
 
 등 ‘긍정적’ 후속기사만 간헐적으로 나왔다. 그나마 5월 둘째 토요일인 8일 이후에는 신문지면에서 아예 기사가 사라졌다.
 
 대신 정부는 피해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을을 정비하고 사망 부상자들에 대한 배상도 군말이 안 나게 신속하고 풍족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국민은 알고 있었다. 비정상적인 권력의 폭압화가 이런 엄청난 재앙도 몰고 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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