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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협, 국화향
문장이 나를 읽었다
묵은 옷을 버리면서
나를 버렸다고 생각한 적 있다
당신 등을 안으면서
안긴다고 생각한 적 있다
나의 눈빛
밑줄 치려는
눈빛들, 심드렁히
그 문장은 나를 읽었다
그 여름 장례식장
죽은 건 그인데 내가 울 듯이
읽을 것처럼
박수호, 그만하면 됐다
꽃 피고
지고
나뭇잎 푸르러
숲이 깊다
작은 꽃들 모여
무엇을 남기고
무엇은 버려야 할지
망설이는데
그 위에 눈발
하나 둘 셋
김수영, 오늘
악수를 한다
삶에 매듭이 또 한 번 생겼다
마주보고 웃는다
들키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
술잔을 기울인다
삼켜야 할 뜨거움이 하나 생겼다
당신과 헤어져 오는 저녁
헛되고 헛된 일이 또 하나 생겼다
모든 날은 지나간다
그러나 언제나 다시 처음이다
천상병,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듣는다
밤중에 깨어나 빗소리를 들으면
환히 열리는 문이 있다
산만하게 살아온 내 인생을
가지런히 빗어주는 빗소리
현실도 꿈도 아닌 진공의 상태가 되어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
눈을 감으면 넓어지는
세계의 끝을 내가 갔다
귓속에서 노래가 되기도 하는 빗소리
이 순간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까
빗소리를 듣는다
김선태, 마음의 집
불혹 가까이 노숙하던 마음이 돌아갈 집을 묻노니
폐허의 집은 저만치 버려져 아직 웅크리고 있다
닫힌 봉창을 열고 다친 마음이 들어가 눕는다
마음은 어찌 어둡다 춥다고만 소리소리했던가
이윽고 쓰라린 마음 한 구석이 간신히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