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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길을 걷다 - 15
게시물ID : panic_753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valanche
추천 : 4
조회수 : 45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2/16 14:46:33
상훈이가 부모님을 잃은 후, 또 나도 부모님의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된후, 우리는 침울한 감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난 상훈이보단 나았던것 같다.

 

적어도 난, 내 가족을 내손으로 죽인다던지 한게 아니니까.....

 

그리고 어디있는지 모를 뿐이지, 아직은 살아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너무나도 지쳐버린 상훈이를 데리고 어딘가로 가는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때의 시간은 오후 네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곧 해가 질게 뻔했고, 놈들이 가득찬 세상에서 밤에 움직인다는건 자살행위나 다를것 없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다가, 내일 다른데로 또 움직여 보자."

 

난 베란다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며 상훈이에게 한마디를 건냈다.

 

상훈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을 할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것 같았다.

 

눈물자국이 짙게 남은 채로 잠들어버린 상훈이는, 마치 죽어버린것 처럼 고요하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난 그런 상훈이를 쳐다보곤 부엌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뭐라도 좀 먹는다면, 기분이 좀 좋아진다든지 안정된다든지 할수 있을 것이다.

 

난 물건들이 반쯤 빠져버린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마 부모님이 여길 떠나면서 먹을것도 바리바리 싸들고 간 모양이었다.

 

항상 라면이나 즉석식품을 넣어놨던 찬장도 반정도는 비어 있었다.

 

햇반 하나쯤은 남겨놓고 갔을줄 알았는데, 정말 말그대로 싸그리 쓸어갔다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꼼꼼한건 알았지만, 정말 이정도까지 꼼꼼하고 완벽하게 짐을 싸서 나가셨을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난 혹시나 뭐가 남아있을까 싶어 냉장고를 열어봤다.

 

만든지 제법 된것 처럼 보이는 나물들과 밑반찬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혹시나 다른 무언가가 있을까 싶어 냉동고까지 열어봤지만, 역시나 부모님이 깔끔하게 다 털어가신 상태여서, 우리 배를 채울 수 있는건 없었다.

 

아마도 오늘 저녁은, 기숙사에서 가지고 온 라면으로 배를 채워야 할것 같다.

 

이왕 먹는거면 좀 따듯하게 끓여서 국물있게 먹는게 나으니까 말이다.

 

난 냉장고를 닫고는 가스레인지 불을 켜보았다.

 

아직 가스는 공급되고 있는지, 짱짱하게 잘 나오고 있었다.

 

옆 싱크대의 물을 틀어보니, 아직은 물탱크에 남은 물이 조금은 있는지 물이 잘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이걸로 라면을 끓여 먹으면 될것 같다.

 

난 저녁을 해먹을 수 있다는걸 확인하곤, 부엌에서 조심스레 나왔다.

 

상훈이는 여전히 소파위에 웅크리고 누워 자고 있었다.

 

깊은 절망감속에 빠져버린 상훈이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을 풍기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힘들것이다.

 

머리속에선 심한 갈등을 하고 있을것이다.

 

자기 가족을 자기가 직접 죽였다는 죄책감, 또 자기 가족이 놈들중 하나로 변해버렸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너무나 클것이 분명했다.

 

난 상훈이의 몸에서 반쯤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내가 상훈이 근처로 갔을땐, 상훈이는 잠꼬대를 하는듯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 ..............."

 

꿈속에서 조차도, 같은것이 반복되고 있었던것 같다.

 

난 그렇게 사경을 헤메고 있는 상훈이가 안쓰러웠다.

 

 

 

저녁정도였을것이다.

 

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있을때, 내가 상훈이 옆쪽에서 가방을 풀고는 안에 있는 식량을 확인하고 있을때였다.

 

 "... 흐으.. 안돼!"

 

상훈이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아주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난 가방을 정리하고 있던 중, 상훈이의 급박한 비명소리에 놀라 상훈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반쯤 어둑어둑해진 주변에도 불구하고, 난 볼 수 있었다.

 

상훈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얼굴 주변으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상훈이는 얼굴을 몇번 문지르곤, 나에게 말했다.

 

 "..... 화장실.... 어디냐....?"

 

난 내 방 앞쪽에 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훈이는 비틀대며 일어서서는,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발을 떼며 화장실쪽으로 몸을 옮겼다.

 

상훈이는 화장실 불을 켜곤, 문을 닫고 잠궈버렸다.

 

그리곤 안쪽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물에 손을 대고 있지 않은지, 아무런 방해물 없이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난 상훈이가 누웠던 자리로 가서 살짝 손을 대보았다.

 

축축했다.

 

심하게 땀을 흘려댔는지, 덮고있던 이불 조차도 조금 젖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건지, 많이 걱정됐다.

 

난 볼수 있었다.

 

그렇게 굳건하던 상훈이가 조금씩 무너져 내려가고 있는것을, 너무나도 잘 볼수 있었다.

 

난 그런 상훈이를 조금이라도 진정시켜 주기 위해, 뭐든 요리를 해주고 싶었다.

 

제대로 남아있는 건 없지만, 그나마 기숙사에서 가져온 봉지라면이 있으니, 이걸로 라면이라도 끓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난 상훈이가 화장실로 들어가 있는 동안, 부엌으로 몸을 옮겼다.

 

찬장을 열며 냄비를 찾았지만, 정말 말그대로 다 긁어갔는지, 아주 작은 냄비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두개를 끓인다면, 넘쳐버릴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없는거 보단 나으니까....

 

난 상훈이가 화장실에 있는 동안, 조용히 가스불을 켜 라면을 끓였다.

 

상훈이가 내게 힘이 되준것 처럼, 나도 상훈이에게 한번쯤은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라면을 끓여서는 거실로 가져갈때 쯤, 상훈이는 화장실의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와있었다.

 

상훈이는 소파위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내가 무언가를 들고오는 것을 보고는 내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먹어. 집에 라면은 몇봉 남아있더라."

 

난 상훈이 앞쪽에 상을 놓으며 말했다.

 

상훈이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다가, 매콤한 국물 냄새가 났는지 소파에서 몸을 옮겨 상 앞에 앉았다.

 

조그마한 냄비 위로는, 하얀 김이 올라오고 있었고, 갓 만들어진 라면은 매콤한 냄새를 풍기며 상훈이를 유혹하고 있었다.

 

난 상훈이 앞쪽과 내 앞에 그릇과 젓가락을 뒀다.

 

상훈이는 멍하니 라면이 들어있는 냄비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먹지 않으면 상훈이도 먹지 않을까 싶어, 난 한젓가락정도를 크게 퍼서 상훈이 그릇에 덜어줬다.

 

 "먹어 임마. 먹어야 정신차리지."

 

상훈이는 아무런 말 없이 내가 퍼주는 라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 영혼을 잃은듯한 상훈이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곤, 내 그릇에 라면을 조금 덜어서 입으로 밀어넣었다.

 

고소한 면과 얼큰한 안성탕면 특유의 국물 맛이, 굳어있던 몸을 풀어주고 있었다.

 

상훈이는 멍하니 그릇만 바라보다, 젓가락을 들고는 그릇 안쪽을 몇번 찔러댔다.

 

그리곤 두세가닥씩 집어서는 입으로 밀어넣으며 깨작깨작 라면을 먹어댔다.

 

그렇게 상훈이는, 시나브로 라면을 먹어댔다.

 

나중에는 불어터진것도 그대로 입으로 집어 넣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아무런 말도 없이 먹고있던 상훈이는 아주 조심스레 나에게 입을 열었다.

 

 ".......우리.... 기숙사 나오기 전에... 자던 그 마지막밤에...."

 

상훈이가 입을 열자, 난 상훈이쪽으로 눈길을 고정시켰다.

 

 "내가... 카톡을 하나 받았거든...."

 

상훈이는 젓가락으로 퉁퉁 불어터져 우동수준의 면발이 된 라면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아빠였어..... 아빠가... 그러시더라고...."

 

상훈이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상훈아... 엄마가... 이상하다... 엄마가... 밖에 나갔다가... 상처를 입고 들어오셨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으셨다..... ... 자기..."

 

상훈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나에게 보일정도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 여기 오기 전에도 느낌이 왔었어.... 분명히... 변했을 거라고.. ... 명히... 흐윽... 변했을게 분명하다고...."

 

상훈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몸을 뒤로 기댔다.

 

 "근데... 막상 보니까... 모든게 무너지는 기분이더라... 아니길 바랬는데... 제발 아니길 바랬는데... 막상 보니까... 억장이 무너지더라고....."

 

상훈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곤,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난 그런 상훈이에게 아무런 말을 꺼낼수 없었다.

 

또다시 상훈이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까... 자는데... 꿈에서도...... 부모님이 나왔어.... 부모님이... 좀비로 변해서... 나를 막 뜯어먹고..... 그러는 꿈이였다고...."

 

상훈이는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슥 닦고는 목이 메이는지 한박자 쉬고 말을 마쳤다.

 

 "꿈에서... 좀비 된 부모님 머리 깨부수고.. 목을 치는 걸 수도없이 반복해서 봤어..... 내가 부모님을 죽였다고.. 내가..."

 

상훈이는 얼굴로 손을 가져가서는, 너무나 괴롭다는듯 얼굴을 가렸다.

 

울음을 참으려곤 하지만, 터져나오는 울음은 이미 멈추기 힘든듯 했다.

 

 ".. 크흑... 흐극.... 엄마... 아빠.... 미안해요..."

 

난 그런 상훈이를 조용히 보고있었다.

 

차마 무슨 말을 꺼내줄수가 없었다.

 

위로의 말을 한마디 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게 독이 될거 같아 차마 말을 꺼내질 못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언제까지나 거기에 묶여서, 언제까지나 거기 파묻혀서 지낼수는 없는거니까....

 

상훈이가 기숙사방에서 처음 갈등할때 내게 보여줬던 그 확고함.. 그걸 보여줘야만 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정말 둘다 죽는거라고 말이다.

 

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상훈아.... 니가 힘든거.. 다 이해해. 니 부모님을 니 손으로 직접 죽였다는거, 너무나 힘들다는거 나도 느껴져... 근데....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놈들중 하나가 됐다는거는... 이미 죽은거나 다름 없는거. 너도 다 알고 있잖아...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거... 뻔히 알고 있잖아... 아마 부모님은 원했을거야. 그 고통을 니가 끝내줬으면 하는걸 말야."

 

상훈이는, 내말이 끝나자 마자, 또다시 통곡을 했다.

 

온 집안이 상훈이가 우는 소리로 가득 찰 정도로, 상훈이는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상훈이의 어깨를 짓누르던 죄책감이, 상훈이를 더 강하게 눌러대고 있는것만 같았다.

 

, 그런 상훈이를 가만히 두고 싶었다.

 

조금만 더,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난 조용히 상훈이 앞에서 밥상을 치우곤 부엌에 조용히 앉아서는 밤을 보냈다.

 

밤을 새면서 들을 수 있었던건, 숨이 턱까지 차오를정도로 고통스럽게 몰아쉬며 울음을 터트리던 상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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