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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우리 모두의 초능력
오래전에 우리는 순서대로 태어났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흘러간 시간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다
수많은 사건들을 창조하자 스르르 얼굴이 변하고
누구나 문득
살인자의 밤을 맞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먼 곳에서 잠든 채
새로운 과거를 생산했다
어제보다 나쁜 자화상을 발명한 뒤에는
지난해의 잡담을 반복하고
희미한 손바닥으로
새벽에 내리는 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느낄 때에는
아침 뉴스의 화면을 향해 드디어
짐승의 욕을 내뱉을 때에도
우리는 매일 그림자를 창조할 수 있고
조용히 그림자와 손바닥을 마주할 수 있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비명을 지를 수 있고
성동혁, 리시안셔스
눈을 기다리고 있다
서랍을 열고
정말
눈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도 미래가 주어진 것이라면
그건 온전히 눈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왜 내가 잠든 후에 잠드는가
눈은 왜 내가 잠들어야 내리는 걸까
서랍을 안고 자면
여름에 접어 두었던 옷을 펴면
증오를 버리거나
부엌에 들어가 마른 싱크대에 물을 틀면
눈은 내게도 온전히 쌓일 수 있는 기체인가
성에가 낀 유리창으로 향하는 나의 침대 맡엔
내가 아주 희박해지면
내가 아주 희미해지면
누가 앉아 있을까
마지막 애인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
내가 나중에 아주 희미해진다면
화분에 단 한 번 꽂아 둘 수 있다면
신철규, 갇힌 사람
두터운 유리관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로를 갇힌 사람이라고 부른다
넌 갇힌 사람이야
흰 돌과 검은 돌이 들어 있는 주머니가 있다
꺼낼 때마다 검은 돌이었다
흰 돌이 나올 때까지 멈출 수가 없다
내가 가지 않은 곳에 나는 있었고
내가 말할 수 없는 곳에 나는 있었다
나는 사람이었고 사람이 아니다
머릿속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조금만 고개를 기울여도 휘청거렸다
한번 떠오른 것은 가라앉지 않았다
썩고 나서야 떠오르는 것이 있다
흐린 물속에 잠겨 있는 틀니 같은 그믐달
새 한 마리가 밤하늘을 바느질하며 나아간다
점선처럼 툭툭 끊기며
내뱉을 수 없는 말들이 입술에 가득 묻어 있었다
거울 앞에서 입술을 뜯어냈다
심장을 손아귀에 넣고 꽉 쥐고 있는 손이 있다
천장에 붙어 있는 풍선들
실을 꼬리처럼 매달고
천장을 뚫고 나가지 못해 안달이 난 것들
나는 네 앞에 서 있다
잿빛 장미를 들고
백창우, 한 두어 달 없어질게요
한 두어 달 없어질께요
뭐 한동안은 찾는 이도 있겠지만
곧 잠잠해질 거예요
답답해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별 다를 것도 없이 되풀이되는 하루하루에 숨이 막혀요
늘 아는 길로만 다니는 게 이젠 지겹고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고장난 시계처럼 내 삶이
멈춰서 있는 것 같아요
내 안에 나 아닌 뭐가 들어앉았는지, 매일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이러다간 어느 날 필름이 끊어져버릴 지도 몰라요
더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 자신이 없어요
좋은 음악처럼 살고 싶은데
고여 있는 큰 웅덩이보다는 작은 도랑물같이 흐르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한 두어 달 돌아다니다 올께요
세상 밖에 서서
세상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거든요
박서영, 너무 오래 되었다
눈을 감고 손으로 읽어보라는데
심연으로 그곳에 닿아보라는데
나는 자꾸 처음의 그 약속을 잊어버린다
눈을 뜨고 만다
점자책을 읽지 못한다
혼신의 힘으로 날아가
흰 흙덩이를 밀어 올린 눈보라를 만져보지 못한다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보았는데
습관처럼 멀뚱멀뚱 눈동자가 열리고 만다
눈을 감고 바람소리를 들어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내 가슴에서 누군가 떠나가는 것을
눈을 감고 깊이 느껴본 적이 있는가
스쳐 가는 것의 목격자가 되어 오래 아파 본 적
너무 오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