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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 원정 이야기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92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4/6
조회수 : 1003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5/18 20:09:25

원정의 시작은 12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남송 정벌에 한창이던 쿠빌라이 칸은 남송 정벌의 일환으로 남송과 친밀하다고 알려진 일본을 회유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당시 가마쿠라 막부 측가 당시 기준으로 머나먼 바다 건너편에 있던 몽골의 회유를 들을리 만무하였고 조공을 바친다면 평화를 보장하겠다는 쿠빌라이칸의 요구를 무시하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진돗개 1를 발령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자극받은 몽골은 1270년 둔전경략사를 설치하여 고려에서 고혈을 짜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272년 목에 걸린 가시와 같던 삼별초가 토벌되고 그 토벌군의 장수들을 수장으로 삼아 일본을 정벌하기로 결정한 몽골군은 1274년에 합포현 지금의 마산에 정동행성을 설치합니다.


당연히 감독은 몽골, 물주는 고려인데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원정 준비 비용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제주도에 주둔한 몽골측 병력 등에 더하여 재해니 뭐니 하는 갖가지 핑계로 더욱 뜯어내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원종이 정신줄 놓는게 매우 당연한 상황이었죠,


어쨌거나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매국노 홍다구의 채찍질에 불과 4개월만에 완성된 9백여척의 군선을 타고 스스로를 삼익군이라 일컫는 도독사 김방경, 박지량, 김문비 등이 이끄는 고려군 8천여명과 도원수 흔도,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등이 이끄는 몽골측 병력 2만 5천여명은 10월 초에 마산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첨언하자면 실상 완성된 배는 기존의 목표치인 3백척 정도로 보는게 옳다고 생각하는게 삼별초의 난등 기존의 군선도 고려해봐야하겠습니다.


물론 작업도중에 물에서 못나와 다리에 구더기가 들끓는 것은 예사요 일하다 죽은 사람은 부지기수이며 이 와중에 결혼도감을 만들어 여성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갔던 몽골 강점기라 일컬을 만한 상황을 옹호할수는 없지만 말이지요,



아무튼 당시 여몽 연합군의 경로입니다.


A 는 동네북단체 관광에 필수 코스인 대마도입니다.

B 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멀티인 이키섬이지요,

C 는 원피스해적들의 본거지로 알려진 다카시마

D 는 규슈에서 제일 중요한 지역인 하카타입니다.


여몽연합군은 이를 불과 15여일만에 돌파했습니다.



뭔가 다른것 같지만 진격 속도나 위력이나 여몽연합군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출항한지 하루 혹은 이틀째인 10월 5일 대마도 남단에 상륙한 여몽 연합군들은 일본군을 2시간여만에 괴멸시키고 약탈 방화 혼돈!!! 을 자행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자면 7~8척의 배에서 상륙한 1천여명의 연합군에 맞서 대마도주 소오스케쿠니宗助國는 당시 6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80여기의 무사들을 이끌고 장렬하게 싸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승산없는 싸움을 고집하는 것은 멍청해보이지만 이게 사실 일본측의 입장에서는 멍청한 행동은 아닙니다.


당시의 일본의 전쟁이란 장수가 나와서 서로의 무용을 겨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명적 즉 소리나는 화살을 쏘면 그 것을 신호로 장수가 나와서 나는 누구 누구의 아들 누구이며 어떤 전투에서 위명을 떨쳤다. 용맹한자 있으면 나랑 한번 자웅을 겨루자!! 라고 하며 상대편은 그에 화답하여 장수 하나가 나서서 역시 자기 소개를 멋들어지게 하고 낭만있게 서로의 무武를 겨루는게 보통입니다.


문제는 몽골군이나 고려군은 명적이 울리면 작전이 시작된다는 신호입니다.


쉽게 말해 명적이 울리니 일본군은 장수가 홀로 나와 자기 소개를 하는데 여몽 연합군은 병력을 휘몰아쳐 일본군을 갈아버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아니면 혼자 나온 일본군 장수를 시쳇말로 다구리를 치든가 해서 일찌감치 저승행 편도 티켓을 끊어주던가 말입니다.


또한 일본군은 전투 도중에도 1:1 대결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하지만 여몽연합군은 낭만을 씹어먹는 이들이었지요(....)


더불어 여몽연합군은 일단 전쟁의 경험이 매우 풍부합니다, 


대몽항쟁부터 바로 얼마전에 끝난 삼별초의 난, 남송과의 지리한 전투, 몽골의 대 원정 등 셀수 없는 전장에서 다져진 군인들이라 상대적으로 경험이 떨어지며 소규모 전투에만 익숙하던 일본측 병력과는 병력의 질적인 차이가 벌어질수 밖에 없으며 이와 더불어 양적 차이도 압도적이고 무엇보다 여몽연합군은 화포를 위시한 화력전을 즐겨합니다, 


이렇듯 다양한 차이들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서 말 그대로 믹서기 안의 토마토 처럼 일본군을 쉽게 갈아버릴수 있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자면 10일간 대마도에서 체류한 이들은 10월 14일 이키섬에 도착하였고 2척의 배에서 4백여명의 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이에 맞서 당시 다이라노 가게다카가 가신 100여명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패배하고 히츠메 성으로 후퇴 공선전을 벌이나 역시나 민병을 포함해도 백여명이 넘지 못하는 병력의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자이후에 상황을 알리는 전령을 보낸뒤 자결합니다.


그리고 이키섬은 역시나 혼돈의 수라장으로 변하게 되었지요, 섬의 크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록상 일본측 피해가 1천여명이라는 말은 곧 양민 학살이 포함되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로부터 3일뒤인 10월 17일에 여몽연합군은 큐슈 서북쪽 다카시마에 도착합니다, 사실 이 행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게 사실입니다. 바로 하카타 만으로 향하는게 보급이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오히려 이득인게 사실이니 말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거의 정설로 나오는게 바로 해적 토벌입니다, 왜구의 근거지로 손꼽히는 지역이었으니 몽골과 고려 양측의 입장을 생각해봐도 여기를 먼저 괴멸시키는 것은 이의를 제기할 문제는 아니지요,


일본 측은 급하게 다카시마에 산성을 구축하고 1백여명의 병력으로 결사 항전을 하나 결론적으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0월 19일 여몽연합군은 하카타 만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하카타 만의 중요성을 살펴보자면 지형적으로 대형 항구가 입지하기에 굉장히 유리합니다. 삼국 시대 이후에 일본이 대륙과의 외교 및 무역항을 하카타로 한정한 것이 납득이 될정도로 상륙에 필요한 백사장, 바람을 막아줄 섬, 안쪽으로 패여져 들어간 만 등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이 완벽에 가까웠고 이는 대규모 상륙지로서도 완벽한 자연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다자이후가 가깝게 위치한것은 항구로서의 입지조건때문이었는데 오히려 이 경우는 문제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거리를 멀게 생각해도 약 16~18km 하카타가 무너지면 바로 다자이후입니다.


하카타가 말 그대로 동북 아시아의 노르망디가 된 순간이지요,


이 다자이후를 지키던 쇼니 쓰네스케에게 몽골연합군에 대한 이키섬의 급보가 전해진것은 13일 무렵입니다, 


이에 쇼니 쓰네스케는 규슈 내의 모든 막부 측에서 파견한 지방관인 슈고와 지토 그리고 쇼군 직할의 무사들로 영지를 가지고 있던 고케닌들을 동원하게 되고 이때 모인 병력이 무사는 5375명, 병력은 대강 추산되는게 최소 1만에서 최대 1만 7천입니다.



하카타 만의 지도와 상륙 경로입니다. 지도는 매립지가 많은 점을 감안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지점은 이마즈

B 지점은 모모치바라

C 지점은 이키노하마(현재의 메이노하마)

D 지점은 하코자키입니다.

동그라미 쳐진 곳이 소하라 산입니다, 하카타를 관망할수 있는 요충지이지요,


본격적인 상륙이 계시 되기 전날인 19일 소수의 몽골군이 먼저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이마즈 해안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일본측 주둔병들을 괴멸시킨 기세를 살려 다시 일부 병력을 소하라산으로 보냅니다.


다음날인 20일 본격적으로 상륙이 시작되자 총사령관이던 쇼니 가케스케는 아카자카 지구의 수비병들에게 이키노하마에 상륙중인 고려군을 요격할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전날에 소하라 산을 점령하고 있던 몽골군과 협력한 고려군에게 전멸당하고 맙니다.


모모치바라에서는 쇼니 가게스케가 맞서 싸우다 무려 부원수 유복형을 활로 맞춰 낙마시키는 전과를 거두었고 하코자키에서는 시마즈 군과 하코자키 하치만쿠의 승병들이 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퇴하여 사실상 하카타의 방위라인은 붕괴되고 맙니다.


그리고 하카타는 야마토 정권을 세운 궁시와 무사의 수호신인 15대 오진 덴노를 모시는 신사인 하치만쿠 즉 팔번궁이 불타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약탈과 방화로 얼룩지게 되었지요,


여기서 많은 분들이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왜 일본의 백성들은 피난을 가지 않았는가라고 말이지요, 


일본은 외부의 침략이 없었던 나라입니다. 


따라서 소수의 무사들간의 혹은 대장간의 결투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 매우 상식적인 일이었고 패배했을때 대장이 스스로 책임을 진다면 부하나 백성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즉 대규모 살육전이 벌어지면 결국은 이기고도 지는것이되며 궁극적으로는 멸망을 향해 스스로 달려나가게 되는 행위인것을 알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물론 끝까지 항전하면 백성들이고 부하들이고 상관없이 학살당하는 것도 관례이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이러한 우리가 보기에는 낭만적인 것이 어느 정도 시대가 변해가고 있지만 사상적으로 사회적으로 당연시되던게 당시 일본이었습니다. 


사족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점령지에서 수많은 민병들이 들고 일어서고 백성 한사람 한사람이 결사적이던 임진왜란은 일본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요, 아무튼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자면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백성들은 남아있었고, 그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패배한 일본측 병력은 서쪽의 관문인 미즈성으로 집결하여 총 옥쇄를 결의합니다, 이 미즈성은 미즈水라는 말 그대로 일종의 제방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하카타에 수공을 가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자폭장치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여몽연합군이 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을 떠나 배로 돌아갑니다.


이유를 본다면 쉽게 이기기는 하지만 목숨을 도외시 하는 일본의 무사들을 비릇한 일본측 병력에 대한 경계와 병력 충원을 비릇한 보급문제등 여러가지 표면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휘부의 내분이었습니다.


고려군은 한번 해볼만 하다, 진격하여 끝장을 보자는 입장이었지만 화살을 맞자 마자 배로 돌아간 부원수 유복형의 문제를 떠나 몽골군의 입장은 진격은 불가하다는 것인데 앞서 언급한 표면적인 문제들을 생각해본다면 나름 현실적인 사유라 볼수 있을것입니다.


물론 오랜 대몽항쟁등을 생각해볼때 고려군이 목안의 가시와도 같다는 점이나, 몽골군에게 불리한 습한 자연환경 등을 생각해볼때도 몽골군의 주장은 나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여기서 참 애매한게 1차 원정은 원사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고려와 일본측 기록만이 있기때문에 고려군이 어떠한 활약을 했는가 객관적 검증이 어려운게 사실이라 2차 원정 기록과 김방경의 처우 문제 등을 생각하여 정황적으로 추정해야 합니다만 아무튼 고려군은 잘 싸우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일본측 기록이나 그림에도 맞서 싸우는 것은 고려군, 도망가는 것은 몽골군으로 주로 묘사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몽골군도 잘 싸우는 장수나 부대는 있었을테고 반대로 고려군도 대충 대충 움직인 이들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김방경을 비릇한 고려군이 대 활약을 한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김방경은 강력하게 진격을 주장한것일테고 말이지요, 어쨌거나 결론이 나지 않아 배에서 숙영을 하던 그날 밤..




여몽 연합군을 카와이 하게 ☆로 잘라볼께요 ♡


 '마침 그날 밤에 크게 바람불고 비가 와 바위와 벼랑에 전함이 부딪쳐 많이 부서지고 김신은 물에 빠져 죽었다.' - 고려사


태풍이 몰아쳤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 들은 후퇴하게 됩니다. 1차 원정 이후의 생존자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이 때 돌아오지 않은 이가 전군에서 1만 3천 5백에 달한다고 하니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 하고 또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가마쿠라 막부는 여몽연합군이 하카타에 상륙하려 한다는 다자이후가 위험하다는 급보를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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