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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물집
못을 박다가 손가락을 찧어 물집이 잡혔다
물집은 아픔의 흔적을 한줌의 물로 보여준다
순간의 고통 속에 갇혀서 흐르지 않는 물
저 물은 북받치던 설움이 선뜻 눈물이 되지 않을 때의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졌다
나에겐 물집이 잡혔던 몇 번의 기억이 더 있다
뜨거운 물에 데었던 기억과
과격한 노동의 끝
벌건 손바닥에 맺혔던 물집의 기억
뜨겁다는 것과 아프다는 것을
갇힌 물로 표현하는
저 벙어리 의 이상한 발성법을 누가 알랴
아침마다 풀잎 위에 맺혀있는 이슬도
하루의 그리움과 뜨거움이 남긴
말없음의 징표라는 것을 누가 알랴
한순간, 하루의 열기가 물집을 만든다
지구를 향한 태양의 뜨거운 사랑
그 무수한 햇살의 못들이 만들어 낸 물집이
달이라는 것은, 밤마다 하늘에 물집이 잡힌 채
환하게 울고 있는 저 달도 모른다
사랑의 저 말 못할 발성법은 물집도 모른다
송승언, 사랑과 교육
좋은 날이야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정말
어느 날의 잠에서 깨어나 떠올린 기억이
어느 날의 산책이 아니라
산책 없이 헤어진 날 들었던 너의 목소리라면 그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거리
모두 사라진 이 거리를 산책하며 쏟아지는
이상한 빛을 바라본다는 것
빛의 좋음 때문에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착각에 휘감기고 있다면
그것은 신의 사랑일 것이다
불타는 이 도시의 꼴이 신의 교육이듯이
산책하며 익히는 건 걸음걸이
세계 불타는 것 중요하지 않고
내가 어떤 궤적을 그리며 걷고 있구나 하는 정도
그리고
좋은 날에 걸으면 죽고 싶다는 것
죽지 말라고 할 사람 죽어야 할 이유
더는 없는데도 몇 번씩이나
오은, 생일
축하해
앞으로도 매년 태어나야 해
매년이 내일인 것처럼 가깝고
내일이 미래인 것처럼 멀었다
고마워
태어난 날을 기억해줘서
촛불을 후 불었다
몇 개의 초가 남아 있었다
오지 않은 날처럼
하지 않은 말처럼
죽을 날을 몰라서
차마 꺼지지 못한 채
허연, 슬픈 버릇
가끔씩 그리워 심장에 손을 얹으면 그 심장은 이미 없지
이제 다른 심장으로 살아야 하지
이제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덤덤하게 이야기 하면
공기도 우리를 나누었지
시간의 화살이 멈추고 비로소
기억이 하나씩 둘 씩 석관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뚜껑이 닫히면 일련번호가 주어지고
제단 위로 올라가 이별이 됐지
그 골목에 남겼던 그림자들도
틀리게 부르던 노래도
벽에 그었던 빗금과
모두에게 바쳤던 기도와
화장장의 연기와 깜빡이던 가로등도 안녕히
보랏빛 꽃들이 깨어진 보도블록 사이로 고개를 내밀 때
쌓일 새도 없이 날아가 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이름이 지워진 배들이 정박해있는 포구에서
명치 부근이 이상하게 아팠던 날 예감했던 일들
당신은 왜 물위를 걸어갔나요
당신이라는 사람이 어디에든 있는 그 풍경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지옥입니다
황규관, 예감
이제 사랑의 노래는
재개발지역 허름한 주점에서 부를 것이다
가난한 평화는 한 블록씩 깨어지고 있다
그 아픔의 마른 냄새를 맡으며
잃어버린 대지를 찾지 않겠다
모든 밥벌이가 단기계약이듯
사랑도 이젠 막바지다
새끼들 칭얼거림을 다 듣고
아내의 지친 한숨도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노래는
터져 나올 것이다
깨어진 기억은 길가에 치워져 있다
천장이 한없이 낮아
일찍 취하는 주점에서
마시고 내린 빈 잔을 가슴에 가득 담을 것이다
사랑은 막바지고
외로움도 좋다
백척간두가 내 힘이다
그러나 다시 노래는 울고 말 것이다
끝내 오고야 말 폐허까지
폐허의, 폐허의 아침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