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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학의 르네상스 세종시대의 과학 (2. 세종의 국책과제)
게시물ID : history_190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누구없소?
추천 : 1
조회수 : 108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2/18 00:01:31
조선과학의 르네상스 세종시대의 과학 (1. 세종과 과학)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8700&page=1 
 
1편 링크입니다.
 
개인적으로 일이 좀 바빠서 2편까지 쓰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그럼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2. 세종이 과학을 국책과제로 삼은 동기
 
 세종의 최종적 목표는 조선이 유교적 국가를 이루어 문명화된 국가 반열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세종에게 유교적인 정책의 확립과 백성들을 교화시켜야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이 과제를 해결할 도구로 세종이 과학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행보가 파격적이라 할 정도로 신선했음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예> 장영실의 등용) 세종의 통치아래 있던 조선시대는 개국초였다. 특히나, 선왕인 태종이 왕위를 선위하는 과정에서 행한 많은 폐륜적인 행위들이 그의 목을 옥죄어 왔다. 선왕의 패권적인 왕권이 아니라 왕도정치하에서 왕권의 강화를 꿈꾸었기 때문에 강한왕권을 가지고 있지만, 세종이 원하는 모습의 왕권의 강화가 우선되었다. 그래야만 개국 초 혼란한 정치적, 사회적 안정이 이루어질 수 있던 것이다. 세종은 앞서 말했듯이 유교의 기초 아래에 문명화된 국가를 만들길 희망하였다. 유교에서 원하는 통치자들은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백성들이 잘 사는 안정된 사회를 만드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는데, 세종은 과학과 산업기술의 발전으로 백성들의 생활안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세종이 국책과제로서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나간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1. 조선의 유교 국교화
 
 조선 초 새 왕조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일은 왕권을 확립하고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세우는데 반드시 필요한 국가적 명제였다. 이 일의 초석으로 주자학이 선택되었다. 당시는 주자학을 통한 이념이 정립되기 위한 시기였다기 보다는 주자학이 많이 보급되어 알려져야 했던 시기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먼저 양반사대부들이 학문과 지식을 연마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유교경전인 사서삼경의 보급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태종은 "책속에 국가 발전을 위한 길이 마련되어 있다."라고 이야기 하며 책을 많이 출판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것의 일환으로 1403년 계미자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였다. 한번에 많은 인쇄물을 찍어내기에 계미자의 내구성이 좋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그것을 개량하기로 하였다. 계미자 인쇄기의 기술상의 결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청동활자와 인쇄기의 개량을 명했다.
 
 [세종실록] 1321년(세종 3년)의 기사에는 "이리하여 왕이 친히 연구하여 공조참판 이천과 전소윤 남급에게 활자와 동판이 서로 맞아 틈이 안 생기게 하도록 명하였다."라고 씌어 있다. 또, 1434년(세종 16년) 갑인자를 주조할 때, 세종은 태종이 계미자를 개발할 당시의 어려움을 이천에게 상기시키고, "태종은 강령으로 주조케 했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청동활자를 잘 만들어 인쇄기술을 혁신하라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조선식 청동활자 인쇄기술에 의하여 필요한 책을 얼마든지 출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정보매체의 기술혁신이었다. 인쇄술 발돌로 인해 출판된 서적은 학자들의 학문과 지식연마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유교적 정책 확립에 영향을 끼쳤고, 유교적 국가 확립이라는 세종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이끌었다. 
 
 
2-2. 백성의 교화
 
 세종은 학자들을 아낀 성군으로 널리 알려졌다. 손수 집현전 학자들의 이불을 덮어주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을 만큼 학문과 학자들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백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마음과 그 실천을 위해 우선 실용적인 과학기술을 축적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세종과 그의 측근 학자들은 과학성과 실용성을 존중했다. 세종대 앙부일구라는 독특한 해시계가 제작되었다. 이 해시계는 과학성과 정확성을 갖축 측정기기이다. 세종시대 과학자들은 거기에 궁중 히시계로서의 실용적 기능을 더해 글을 모르는 백성도 보고 알 수 있도록 시신(時神)을 그림으로 그려넣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한성의 종묘 앞거리와 혜정교에 설치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배려하는 인정과 과학기술의 발달은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청동활자 인쇄기술의 혁신은 학자들의 지식연마뿐 아니라 백성의 교확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문란한 사회상으로 인해 사회기강의 확립이 무엇보다 절실한 문제로 인식되어 있었다. 따라서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키고자 하였다. 세종은 "널리 민간에 보급하여 어진자와 어리석은자, 귀한자와 천한자, 어린이와 부녀자의 구별 없이 모두 다 즐겨보고 익희 들으며, 읊어서 인정과 성품을 본받게 하라"라 하며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한자어로 작성되어 있었고, 이후 정음이 창제되었다. 조선의 문자로 대체되어 작성된 책은 조선만의 청동활자 인쇄기술을 통해 출판되었고, 백성에게 보급되어 교화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2-3. 조선의 자주성 확립
 
 세종은 모화사상과 사대주의를 강조하여 중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기술을 받아드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만의 기술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조선이 가진 잠재력과 기질을 긍정적으로 여겨 조선의 자주성 확립의 도구로 과학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기술자립과 신기술 개발을 위한 거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선왕조의 자주적 천문 역법을 세우기 위해 제안된 야심찬 국가적 프로젝트가 결과를 맺었다. 대간의대라는 경복궁 천문대의 건설과 여러가지 관측기기들의 제작, 수준 높은 관측제도에 따른 천문현상의 정밀한 관측 그리고 [칠정산 내편]과 [칠정산 외편]이라고 이름 지은 조선의 자주적 역법을 세웠다. 세종시대의 천문역법 전개에서 천문도 각석도 빼놓을 수 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조선이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진 1467개의 별은 당시 중국 별자리 그림의 별 1465개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조선 천문학자들의 자체 관측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기술자립과 개발을 위한 노력은 산업과 기술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었다. 금속제련 및 합금기술과 제지기술 그리고 요업기술과 토목, 건축기술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전통기술을 이어받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중국과 일본 등지의 새로운 기술정보를 찾아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종과 그를 보좌하는 학자 관료들은 그것을 정책적으로 밀고나가는데 적극적이었다. 조선왕조는 기술과학자들과 장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임금의 특명으로 밀고나갔다. 조선의 기술과학자들은 중국에 파견되어 중국의 첨단기술과 이론을 익혔고 조선의 기술과 비교 연구하여 확실한 체계와 기술이론을 세울 수 있게 하였다. 새로운 조선의 기술과학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김호, [조선과학인물열전]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8년)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의 과학문화재]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2004년)
전상운, [한국과학사] ((주)사이언스북스, 2000년)
전상운 외, [한국 과학기술 인물 12인] (해나무, 200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세종시대의 문화] (태학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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