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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둑계의 전설을 꼽으라면 단연 이 분을 꼽겠습니다.
게시물ID : sports_930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세월은안간다
추천 : 12
조회수 : 1288회
댓글수 : 47개
등록시간 : 2015/02/03 19:01:47

아마 많은 분들이 이창호국수를 예상하셨겠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조훈현 국수를 꼽고 싶습니다.

14.jpg

<젊은 시절 날카로운 모습 한 컷>



-조국수의 유년 시절-

조훈현 국수는 월출산 자락에 위치한 영암에서 태어났지요.

조국수가 바둑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은 네살 경에 알게되었는데요, 그 과정이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조국수의 선친이신 조희아옹은 평소 처남과 즐겨 바둑을 두곤했는데, 아직 네살 밖에 되지 않은 조훈현이 늘 바둑판 옆에 앉아서 구경을 하곤 했답니다. 그나이 때의 어린아이라면 당연히 바둑을 훼방을 놓든가 아니면 돌을 갖고 장난을 치려할텐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얌전히 구경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조희아옹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가만히 구경을 하던 네살 조훈현이 "아부지 여기다 한 번 둬 보시지요잉~"하고 훈수를 놓더랍니다.
그래서 하도 어이가 없던 아버지가 조훈현 더러 "이 눔 자식, 그러면 니가 한 번 둬 봐라"라고 했는데, 아버지 바둑 돌을 대신 잡은 조훈현이 외삼촌을 데꺼덕 이겨버렸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 조희아옹의 바둑 실력은 대충 10급 정도였다고 하니, 외삼촌도 비슷한 실력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하지만, 생전 바둑을 배워 보지도 않은 네살 짜리 아이가 구경만 하던 실력으로 바둑을 둔다니, 그리고 도 첫 판에서 이기다니 이거야 말로 놀랄 노자였겠지요.
더 신기한 건, 그 나이에 자기가 둔 바둑을 그대로 복기까지 하더라는 겁니다.

아들의 바둑에 대한 범상치 않은 재능을 발견한 조희아옹은 다음 날 바로 아들의 손을 잡고 도시의 프로기사에게 가서 테스트를 받고 곧 정식으로 바둑을 배우게 되었지요.

어린 나이에 서울로 바둑 유학을 온 조훈현은 하라는 바둑 연습은 안하고 틈만 나면 만화방에 쳐박혀서 만화나 보기 일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훈현은 겨우 9살의 나이에 '프로 기사'테스트를 통과합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세계 최연소의 기록이며 아무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당시 프로테스트는 한국기원 원생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내노라 하는 아마추어 고수들이 전부 모여 들어 리그와 토너먼트를 하는 시합 방식인데, 거기서 9살 조훈현이 당당히 통과를 한 겁니다.


그 뒤 조훈현은 일본의 초청으로 바둑 유학길에 오르게 되는데, 일본 유학 시절의 스승이 바로 그 유명한 세고에 겐사꾸 9단입니다. 조훈현이 당연히 자기 문하로 올 줄 알았던 기타니 9단은 세고에를 상대로 소송을 불사하려 했으나 워낙 일본 바둑계의 최고 원로로 존경 받는 세고에라 참고 넘어가면서 울분을 삼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고에 선생은 딱 세명의 제자만 두는데, 바로 일본 관서기원의 전설 하시모토 류타로와 얼마전 100세로 타계하신 현대 바둑의 개척자 우칭위엔(오청원), 그리고 조훈현 이 당대 최고 천재들이었지요.

결국 조훈현이 군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한국으로 귀국하자 세고에선생은 조훈현의 빈자리를 참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는 비극이 따르기도 했지요.

잡다한 이야기는 그만 두더라도조훈현이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여 그를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려 놓기 전까지 한국바둑은 거의 조훈현의 독무대였습니다. 도전기 33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과 네차례의 전관왕(당시 존재 하는 모든 기전을 다 우승)은 다시는 세울 수 없는 기록이 될 겁니다.

하지만 당시 바둑에서 세계 최고는 자타 공인 일본이었고, 일본은 한국 바둑은 완전히 한 수 아래로 봐서  공식 교류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일본은 당시 막 부상하기 시작하는 중국을 상대로 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하고자 '중일 수퍼대항전'이라는 것을 개최하게 되는데, 일본의 두터운 고수들 앞에 중국의 기사들은 추풍낙엽,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지요. 단 한명, 섭위평을 제외하면요.

중일수퍼대항전은 승자승으로 각각 9명의 선수가 출전해서 1대 1로 맞붙은 다음 지는 사람은 탈락하고 이기는 사람은 계속해서 다음 상대와 붙는 그런 시합이었지요. 그 시합에서 중국과 일본은 엎치락 뒤치락하지만 결국 섭위평9단이 마지막 3승을 혼자 따내며 중국의 우승을 이끌며 중국 바둑의 위세를 과시하게 됩니다. 그 뒤로도 일본은 섭9단에 번번이 덜미를 잡혀 중국의 위세를 높여주기만 합니다.

이러한 때 대만 출신 사업가였던 응창기씨가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40만달러라는 상금을 걸고 지구 최강 기사를 뽑는 시합을 개최하게 됩니다. 사실상 중국-일본의 시합이지만 세계대회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답시고 총 16개의 시드 중에 일본 6개, 중국 4개를 주고 미국, 호주 출신 아마추어 기사와 듣보잡(?) 한국 대표에게도 한장의 시드를 줘서 조훈현 9단이 겨우 출전하게 되는데요,

그 시합에서 조훈현은 내노라 하는 일본의 초고수들을 전부 꺾고, 결승에서는 누구나 당시 세계 1위라고 인정하던 섭위평 마저 쓰러뜨리고 우승함으로써 한국 바둑의 위상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전까지 국내 기전은 별로 인기도 없고 프로 기사들도 최상위 몇 명을 제외하면 먹고 살기도 함든 지경이었으나, 조훈현의 이 대회 우승으로 국내에서도 어마어마한 바둑 붐이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이창호를 비롯한 수많은 신세대 프로기사들이 자라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hwanjang-4.jpg



이런 조훈현의 일화 중에는 세계 체쓰 챔피언과의 시합에서 이긴 일도 있었는데요, LA에서 열린 체스 시합을 참관하던 중 우연찮게 체스마스터와 인사를 하고 주위의 권유로 난생 처음 체스 시합을 하게 되었는데, 그만 조훈현이 덜컥 이겨버렸다고 합니다. 체스 마스터는 너무나 놀라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지 물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게 공식 시합도 아니었고 체스 마스터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기였겠지만 생전 처음 해 보는 게임에서 그 방면 프로를 이긴다는 건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지요.

어찌되었거나 박세리가 우리나라 여자 골프의 중흥을 만들어 낸 원조라면, 조훈현은 그야 말로 우리나라 바둑산업을, 크게는 게임 산업에 이르기까지 그 발판을 만들어 낸 인물이라고 감히 얘기하고 싶습니다.

베오베에 스포츠를 빛 낸 인물 중 바둑 부문에 이창호 9단이 선정되었길래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조훈현 9단 얘기를 두서없이 써봤네요. 어릴 때 조훈현 9단을 실시간으로 봐왔기 때문인지, 이 세상 천재 중에 한명을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늘 조훈현 9단을 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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