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잿빛 길을 걷다 - 19
게시물ID : panic_754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valanche
추천 : 1
조회수 : 37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2/18 16:18:21
어제, 인간이 아닌 인간을 만난 후로 과도하게 긴장을 해서 그런지, 잠자리가 그리 편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허리가 끊어질것처럼 아팠다.

 

원래부터 허리가 안좋긴 했지만... 어째 그 통증이 더 심해진것 같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

 

고현으로 출발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상훈이와 난, GS에서 가져온 스위트콘 통조림 하나를 따서 나눠먹곤, 또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이번에는 꽤나 오래걸릴 것이다.

 

버스로도 30분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차로도 15분에서 20분은 잡고 가야 했던 거리기 때문에, 행여나 걸어간다고 치면 무작정 걸어야 할것이다.

 

우리는 어제 빼두었던 배낭속 짐들을 가방속에 다시 우겨넣었다.

 

홀쭉했던 가방이, 다시 빵빵하게 배를 내밀고 있었다.

 

걷기 불편하거나, 너무 큰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부피가 커지면 불편해질것 같았다.

 

떠나기 전에, 혹시나 아직도 물이 나올까 싶어서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보니, 아직은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듯한 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신을 확 깨워줄수 있는 샤워를 할 정도는 충분했다.

 

우리는 떠나기 전, 이 사태가 터진 후 처음이자 마지막 샤워라는 생각을 하며 몸에 물을 끼얹었다.

 

너무나 차가워서 이가 부딪힐 정도였지만, 그래도 없는거보단 나았다.

 

온몸에서 비누향이 나는걸 보니 살짝 기분이 좋아지려 했다.

 

이런 지옥같은 곳에서 느낄수 있는 소소한 행복인것 처럼 보였다.

 

우리는 삼일정도 입고있던 속옷을 버리곤, 내 방에 남아있던 팬티와 양말로 갈아입었다.

 

마치 새단장을 한 것 같았다.

 

샤워하고, 속옷을 갈아입은게 이렇게 소소한 기쁨을 줄지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는 짧은 순간에 온 행복을 즐기며, 벗어뒀던 옷을 갈아입었다.

 

트레킹바지를 입고, 긴팔 라운드넥을 입고.

 

그 위에 바람막이를 걸치니, 묵직한 바람막이가 느껴졌다.

 

문득 주머니 안쪽에 꽂혀있는 리볼버가 생각났다.

 

어제 이게 없었다면, 우린 정말 거기서 머리통이 터져버렸겠지.

 

난 피식 웃으며 모자를 눌러쓰곤, 옆에 떨어져있는 마스크를 주워 귀에 걸었다.

 

아마 집에 다시 돌아오려면 꽤나 오래 걸릴것이다.

 

고현 자체도 되게 넓기 때문에, 거기서 이틀이나 사흘정도를 쓸것 같았다.

 

우린 집을 나서며 굳게 문을 닫아 잠그곤, 또다시 잿빛 세계로 몸을 던졌다.

 

 

 

 

고현을 가려면, 옥포 위쪽에 있는 큰 길로 나가야먄 했다.

 

우리는 집으로 오기 위해 달려왔던 골목길을 그대로 다시 되짚어 올라갔다.

 

중간중간에 놈들이 세네마리정도 나오긴 했지만, 이젠 놈들 머리를 찍는게 무섭지 않았다.

 

그냥 길가에 걸어다니는 바퀴벌레를 밟아죽이듯, 우리는 그렇게 놈들의 머리를 가르고, 놈들의 머리를 따주었다.

 

위쪽 큰 길에 도착했을때,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건 황량함이었다.

 

이때까지 봤던 길이 다 똑같았다.

 

뒤집어진 차가 있고, 불타버린 차가 있고, 여러 차들이 버려진채로 놓여있고.

 

늘 똑같았다.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고, 차들이 엔진소리와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고 있어야할 거리는, 완전히 버려진채 고요한 참상만을 남기고 있었다.

 

우린 그 고요한 거리 사이로, 모든것이 버려진 황무지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고현으로 가려면 차를 한대 찾아야 할것이다.

 

예전에 아빠와 고현을 나갈때, 거리가 어느정도 될까 궁금해서 차량 미터기로 거리를 잰 적이 있다.

 

10킬로미터가 조금 넘게 나왔던 기억이 났다.

 

그 먼 거리를 직접 걸어가려면, 거기 도착하자마자 다리가 풀려 아무것도 하지 못할게 뻔했다.

 

우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쓸만한 차가 있나 찾아봤다.

 

그때 저 멀리서, 그랜져 한대가 문을 연채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색깔과 외형을 보니, 우리가 침매터널을 나오고 나서 타고 온 그 차 같았다.

 

난 상훈이 어깨를 툭툭 치곤 차쪽을 가리켰다.

 

상훈이도 그 차를 본것인지, 입꼬리쪽이 살짝 올라가는게 보였다.

 

우리는 활짝 열린 차문 너머로 고개를 넣어 안쪽을 살펴봤다.

 

2,3일정도 버려져 있어 누군가가 건드릴줄 알았지만, 다행이도 그 어떤 누구도 접근하지 않은듯 했다.

 

안에 스마트키가 그대로 있는걸로 봐서는, 접근조차도 하지 않은듯 했다.

 

혹은 함정인줄 알고 멀리서 지켜만 봤을 수도 있다.

 

길 건너편에 있는 외국인 바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난 인간을 사냥감으로 노리는 또다른 괴물의 눈길을 느끼며, 차에 몸을 실었다.

 

익숙한 느낌과 익숙한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상훈이는 곧바로 시동키를 눌러선 차의 시동을 켰다.

 

아직 기름이 남아있는지, 아직 배터리가 좀 남아있는지, 부드러운 떨림이 느껴지며 차의 엔진은 피스톤을 돌려대기 시작했다.

 

난 차문을 닫고는, 안전벨트를 맸다.

 

상훈이도 바깥을 몇번 두리번거리다가, 차안으로 들어와서는 핸들을 굳게 잡았다.

 

차는 굉음을 내며, 길을 따라 전진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차를 돌려 고현쪽을 향해 나아갔다.

 

 

 

 

 

 "너도 아까 느꼈냐?"

 

거가대교쪽에서부터 이어진 인터체인지를 지나자마자, 상훈이가 나에게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

 

 "아까 누가 우리 보고있는거 같은 느낌말야."

 

상훈이는 나를 살짝 쳐다보곤 말했다.

 

 "너도 느꼈냐?"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훈이마저 느꼈다면, 정말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이더웨이에서 만난 놈들이랑 비슷한 놈들이겠지.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그런 미친놈들말야."

 

난 모자를 벗어서는 옆쪽 손잡이쪽에 살짝 끼워놓으며 말했다.

 

 "미친놈들이지. 자기들 살겠다고 남들까지 죽이는 놈들......"

 

상훈이는 앞쪽 차선을 열심히 주시하며 내 말에 답을 해주었다.

 

자기들 살겠다고 남들까지 죽이는 놈들이라......

 

틀린말도 아니었다.

 

아주 정확하게 본것이다.

 

물자를 얻으려고, 물자를 가진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무기를 휘둘러 머리를 까부수고.

 

아마 자신들이 살아 남으려는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방어기재일것이다.

 

하지만, 그 방어기재는, 인간의 이성을 모두 버린채로 자신의 본능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만 살면 된다. 남들은 걸림돌일 뿐이다 하는 본능에 충실한 사고만을 가지고 있었다.

 

상훈이는 길을 따라 운전하다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디큐브 백화점도 털렸을까....?"

 

상훈이의 말을 듣고는, 홈플러스 윗쪽에 있는 디큐브 백화점이 생각났다.

 

거제 안쪽에 있는 제일 규모가 큰 백화점이었다.

 

명품이나 온갖 옷들, 정말 갖가지 물건들을 팔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분명히 털렸을것이다.

 

한치의 의심도 가질 필요 없이, 아주 조금의 사고를 할 필요도 없이 털렸을게 뻔하다.

 

문득 삼풍백화점 사고가 생각났다.

 

 "1995 6 29, 서울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사고가 났지. 그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어. 소방대원들이나 사람들이 한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그쪽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으려 했지. 정말 마지막 한사람이라도, 한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살려보려고 모두가 그쪽으로 신경을 쏟고 있었지. 근데 그 사이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알아?"

 

상훈이는 내쪽으로 힐끔 눈길을 돌렸다.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데?"

 

상훈이는 궁금하는 듯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그 혼란과 잿더미 사이에서도, 자기가 쓸만한 명품이 있나, 자기가 건질만한 물건이 있나 보면서 물건을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었지. 아 물론 그게 다수는 아냐. 그렇다고 없었던것도 아니지. 그 사진 있잖아. 물건 훔쳐가면서 웃고있는 그 사람말야."

 

상훈이는 전방을 주시하며 내 얘기를 듣고있었다.

 

 "사람들이 다른사람을 살리려고 모든 신경을 쏟고있는 그 틈에,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자기욕구를 채우려고 그 난장판에 뛰어든거지. 그리고는 자기가 원했던걸, 자기가 가지고 싶었던걸 집어 갔지. 자기 욕구랑 본능에 충실해서는, 기본적인 도덕을 잊어버리고, 윤리를 잊어버린거지."

 

난 목이 답답해져서 바람막이 지퍼를 살짝 내리고는 마스크를 풀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니, 어찌보면 더 심해. 그 어떤 누구도 이 사태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뭐때문에 시작됐는지, 어떤식으로 퍼져나가는지 몰라. 만약 알았다면 국가 차원에서 막으려 들었겠지. 돈이란 돈은 다 퍼부으면서 막으려고 했겠지. 근데 지금 아무런 정보도 없잖아. 그나마 정부답게 하나 했던거는 대피소로 피하라고 말했던 방송 뿐이었지. 근데 그마저도 거기 도착해서 희망이란 희망을 모두 잃어버렸잖아. 그러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겠지. '아 난 여기서 살아 남아야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한다.' 이런 생각이 드는거지. 생존본능이 인간이 가진 본능중에서 가장 강한 본능이니까. 비단 인간뿐만이 아냐. 모든 동물이 그래."

 

상훈이는 내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강의를 해준다는 느낌이 났다.

 

 "근데 웃기는게 뭔지 알아? 지금 상황은, 아나키 상태야. 무정부상태랑 똑같다고. 당장 내 눈앞에 날 죽이려는 놈들이 있는데 법이 무슨 상관있고 규칙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 내가 알고있던 그런 사회적 가치나 도덕들이 무슨 상관이 있겠냐는 말이지. 시민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줘야할 정부도 지금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아무런 도움도 못주는게 뻔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신뢰를 잃어가겠지. 정부에 신뢰를 잃고, 규칙을 부정하고, 자기가 믿고있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신념이랑 가치에 맞춰 행동하겠지. 그리곤 사람까지 부정하고, 사람까지 불신하겠지."

 

 "...... ...."

 

상훈이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화점이 털렸냐고? 털렸겠지. 아니, 털렸어. 우리가 만났던 그 쓰레기 같은 도둑놈들이 더 있겠냐고? 있겠지. 아니 있어. 분명히 있어. 법이나 도덕이라는 모든 브레이크가 풀린 지금 상황에서는 자기 본능이랑 자기 욕구에 맞춰서 행동하는 놈들이 태반일거라고. 아니, 태반이야."

 

난 말을 잠시 멈추곤 바깥을 내다봤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있고, 온 세상은 잿빛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고현에서도, 회색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중심부에서는 잿빛이다 못해 갓 불이 붙었는지 까맣고 매캐한 연기가 세차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든것들은 색채를 잃은채로 서있었고, 우리들의 눈앞에는, 무채색의 세계만이 펼쳐지고 있었다.

 

 "니가 미스터리한거 정말 좋아해서 나도 그쪽으로 몇개 읽어봤어. 좀비관련된 소설도 몇개 읽어봤고. 근데 그 소설들 공통점이 뭔지 알아? 인간이길 포기한 인간이 너무나 많다는거야. 당장 다른 인간 먹으려고 본능에 따라서 행동하는 좀비랑 전혀 다를것 없는 인간이 너무나 많단말이지. 자기들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도덕이나 모든걸 버리고 자기들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데, 그게 인간이라고 할수 있어?"

 

우린 잿빛도시의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를 뚫고, 또다른 놈들의 도시로 들어가고 있었다.

 

 "잘들어. 이 세계에 더이상 인간은 없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인간은 나 하나 뿐야. 그거만 기억해."

 

검은색의 그랜져는, 새로운 세계로 몸을 미끄러지듯 밀어넣고 있었다.

 

우리는 또다른 지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또다른 괴물들의 세계 한가운데로......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