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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 분갈이
뿌리가 흙을 파고드는 속도로
내가 당신을 만진다면
흙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놀라지 않겠지
느리지만
한 번 움켜쥐면
죽어도 놓지 않는 사랑
박정만, 마지막 편지
그대에게 주노라
쓸쓸하고 못내 외로운 이 편지를
몇 글자 적노니
서럽다는 말은 말기를
그러나 이 슬픔 또한 없기를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그 사람 볼 일이요
그 사람 없을 때 또한 잊을 일이다
언제 우리가 사랑했던가
그 사랑 저물면
날 기우는 줄 알 일이요
날 기울면 사랑도 끝날 일이다
하루 일 다 끝날 때 끝남이로다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박형준, 달 속에 두고 온 노트
그녀는 이제 요양원 침대에 누워 있다
그녀의 머리맡에 두고 왔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베낀 노트 한 권을
달에서 어머니의 빈 젖을 빠는
소리가 들린다 버스 창가
지나가는 달을 올려다보는 이여
신효순, 관상
긴 시는 밝은 날 해에게 꺼내주고
짧은 시는 석양 예쁜 마을에 가 붉어진 개울에나 보여주어야지
오래된 종이 한 장도
비장하게 나무의 결을 지우는 중인데
말에는 서러운 마음이 아직 덕지덕지 붙어 있다
울다 보면 문득
머리만 커진 다섯 살 애가
첫 기억의 문지방을 넘고 있다
돌아보는 눈가에 핏발이 하나
사납게 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