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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단편집 내 여자의 열매 中
게시물ID : readers_93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심드렁
추천 : 2
조회수 : 86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0/18 12:29:17

이상하지요 어머니.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고 맛보는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져요. 간선도로를 거칠게 미끄러져 가는 차들의 질주를, 그이가 현관문을 열고 나에게로 다가오는 발소리의 미세한 울림을, 비 내리기 전이면 비옥한 꿈에 젖어 있는 대지를, 안개를 품은 새벽하늘의 희부연 빛을 나는 느껴요.
가깝고 먼 곳에서 싹이 돋고 잎이 피는 것, 애벌레들이 알을 깨고 나오고, 개들과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고, 옆동 노인의 맥박이 멈출 듯 멈출 듯 멈추지 않고, 윗집 주방의 냄비에 시금치가 데쳐지고, 아랫집 전축 위에 놓인 항아리 가득 허리 잘린 국화 다발이 꽂히는 것을 느껴요. 낮이나 밤이나 별들은 유연한 포물선을 그리고, 해가 뜰 때마다 간선도로변 플라타너스들의 몸은 간절히 그쪽으로 기울어 집니다. 내 몸도 따라서 그쪽으로 활짝 펼쳐져요.
이해할 수 있으세요? 이제 곧 생각할 수도 없게 되리라는 걸 알지만 나는 괜찮아요. 오래 전부터 이렇게 바람과 햇빛과 물만으로 살수 있게 되기를 꿈꿔왔어요. 





*





어머니, 무서워요. 내 사지를 떨구어야 해요. 이 화분은 너무 좁고 딱딱해요. 뻗어나간 뿌리 끝이 아파요. 어머니, 겨울이 오기 전에 나는 죽어요. 이제 다시는 이 세상에 피어나지 못하겠지요.





단편 아홉개의 이야기 중

-어깨뼈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지.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힌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風磬)소리를 낸 순간.


















시같은 글을 쓰는 작가 한강 님의 단편 소설 중 일부 발췌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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