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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연, 순간 순간
떠나고 싶어
하지만 한 번도 떠난 적은 없어
이상하지 떠나고 싶어지면 짐을 싸야 하는데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찾고 있으니까
이것저것
묶였고 묶어버린 끈들 때문에
떠나고 싶단 생각도 금방 접어버려
그때마다 난 떠나고 싶어
신경림, 고목을 보며
그 많던 꿈이 다 상처가 되었을 게다
여름 겨울 없이 가지를 흔들던 세찬 바람도
밤이면 찾아와 온몸을 간질이던 자디잔 별들도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게다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
꽃보다도 또 열매보다도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인데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이정하, 사랑의 우화
내 사랑은 소나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가랑비였습니다
내 사랑은 폭풍이었으나
당신의 사랑은 산들바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었지요
한때의 소나긴 피하면 되나
가랑비는 피할 수 없음을
한때의 폭풍 비야 비켜가면 그뿐
산들바람은 비켜갈 수 없음을
장시우, 섬강에서
열리지 않는 섬
꽃망울을 피워 올린 몸짓은 힘겹다
눈뜨지 못할 아침이 찾아와
나무를 흔들어 깨우고
햇귀는 그늘을 지운다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풀꽃은 잠시 흔들렸다
가슴 깊이 물이 스며
들숨 날숨이 뒤섞인 섬강은
뿌리 속으로 물이 들었다
물떼새 날갯짓 따라 흐른다
눈 감으면 발목에 감기는 강물소리
그는 울음을 강바닥에 묻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달맞이꽃과 같아서
그에게 가서 입을 맞춘다
풋잠처럼 씨앗처럼
허수경, 밤 속에 누운 너에게
가끔 너를 찾아 땅 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저 침침하고도 축축한 땅속에서 시간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너를 찾으려 했지
땅속으로 내려갈수록
저 뿌리들 좀 봐, 땅에는 어쩌면 저렇게도 식물의 어머니들이
작은 신경줄처럼 설켜서 아리따운 보석들을 빨랫줄에 걸어두는데
저 얇은 시간의 막을 통과한 루비나 사파이어 같은 것들이
땅이 흘린 눈물을 받은 양 저렇게 빛나잖아
가끔 너를 찾아 땅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사랑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세월 속으로 가고 싶어서
머리를 지하수에 집어넣고
유리처럼 선명한 두통을 다스리고 싶었지
네 속에 눈물이 가득할 때
땅은 속으로 그 많은 지하수를 머금고 얼마나 울고 싶어 하나
대양에는 저렇게 많은 물들이 지구의 허리를 보듬고 안고 있나
어쩌면 네가 밤 속에 누워 녹아갈 때
풀 없는 사막은 너를 향해 서서히 걸어올지도 모르겠어
사막이 어쩌면 너에게 말할지도 몰라
사랑해, 네 눈물이 지하수를 타고 올 만큼 날 사랑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