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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그러니 애인아
바람에 출렁이는 밀밭 보면 알 수 있네
한 방향으로 불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람이
실은 얼마나 여러 갈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배가 떠날 때 어떤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물을 바라보지
그러니 애인아 울지 말아라
봄처럼 가을꽃도 첫 마음으로 피는 것이니
한 발짝 한 발짝 함부로 딛지나 말아주렴
한시종, 사랑, 그 몹쓸 병
섣불리 사랑하지 말 걸 그랬나 봅니다
그리워지는 시간이 너무 많아져
생각하는 모든 것이
쳐다봐지는 모든 곳이
그대 모습으로 도배가 되어져 버렸고
그리워하기 위해 사는 건지
살다가 그리운 건지
이젠 구분도 되지 않습니다
비 내리는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떨어지는 찬비 온몸으로 다 받는
바보 같은 행동도
그대로 인한 것입니다
따가운 햇살 속에서 먼 한 곳 응시하며
얼굴 다 타는 줄도 모르고
넋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는 것도
그대로부터 연유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혼돈
사람 이리 멍청해지게 만드는 사랑
도무지 뭘 하며 어찌 사는지
나 자신도 모르는 까닭이니
아마도 몹쓸 병에 걸렸나 봅니다
이정하, 기다리는 이유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였다
어쩌면 나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기다린다는 것
그건 참으로 죽을 맛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해가 지고, 내 삶이 졌다
그 하늘 위로 수많은 별이 떠오를 것이고
어쩌면 오늘 밤 길 잃은 별 하나가
저 우주 너머로 자취를 감출지도 모를 일이다
오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이 무언지 묻지 마라
때론 말도 되지 않은 것이 어떤 사람에겐
목숨보다 더 절실한 것이 될 때도 있으니
그것이 기다리는 이유
그것이 내 살아있는 이유다
김경미, 어떤 여름 저녁에
한여름, 선풍기에서 나오는 약풍 혹은 미풍이란 글자
처음 사랑의 편지 받았던 촉감일 때 있다
크게 속상하고 지친 울음 거두고 마악 여는 문
경첩에서 흰 바다 갈매기들 바닷물 닿을 듯 낮게
마중 나올 때가 있다
극도로 줄이거나 높인 음악 소리 속
가본 기억 없는 모르코사막의 터번 두른 낙타
눈 아픈 모래바람 앞서 가려줄 때가 있다
유리창 너머 시원한 액자 속 흰 양떼구름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처럼
갈래머리 계집아이의 어린 설렘 되감아줄 때 있다
어떤 여름 저녁
그 모든 것들 한꺼번에 밀려나와
더위보다 큰 녹색 수박의 무수한 조각배들
잊을 수 없는
석양의 출항을 시작할 때가 있다
서석화,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지 못했다
낮에는 천 개의 달빛 속에
밤에는 천 개의 햇빛 속에
시간은 창을 넘어 거꾸로 달리고
머리 구겨지는 쓸쓸함에
하늘이 떨어진다
잡으면 달아나는 지평선처럼
마주 본 만큼 땅은 넓어져
그림자를 늘여도 닿을 수 없어라
도착지를 모르는 기적소리 요란하다
가을꽃 엮어서 방 하나 만들까
흰 밤을 풀어서 벽 하나 세울까
오래된 꿈 깨워 천정을 덮으면
눈물방울 떨어진 곳 남은 세월 가둬질까
우리는 서로를 배경으론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목 아프게 내뱉는 암호를 띄우는 오늘
가을이 녹슬어 쇳물 같은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