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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변명
사랑이란 것은 쓸쓸한 거였다
누군가를 위해 한 발짝 물러선다는 것은
자신은 내내 외로움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곁에 두지 않는 법이라고
김재진, 기다리는 사람
설령 네가 오지 않는다 해도
기다림 하나로 만족할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묵묵히 쳐다보며
마음속에 넣어둔 네 웃는 얼굴
거울처럼 한 번씩 비춰볼 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있던 저무는 해를
눈 속에 가득히 담아둘 수 있다
세상에 와서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것
알고 보면 다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동안 따뜻했던 내 마음을
너에게 주고 싶다
내 마음 가져간 네 마음을
눈 녹듯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다
삶에 지친 네 시린 손잡아 주고 싶다
쉬고 싶을 때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기다림으로
네 곁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다
신경숙, 폐허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폐허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인간의 폐허야말로 그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아무도 자신의 폐허에 타자가 다녀가길 원치 않는다
이따금 예외가 있으니
사랑하는 자만이 상대방의 폐허를 들여다 볼 뿐이다
그 폐허를 엿본 대가는 얼마나 큰가
무턱대고 함께 있어야 하거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거나
때로는 치유해줘야 하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
나의 폐허를 본 타자가 달아나면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가 되었던
그 일치감의 대가로 상처가 남는 것이다
이해인, 풀꽃의 노래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오래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탁명주, 통째로 가슴이 멍들다
통째로 가슴이 멍들다
녹듯이 슬픔의 순간은 지났건만
통째로 가슴이 멍들다
어두운 조명이 한꺼풀 접히어 갈때면
혼자서 지껄이던 라디오 소음마저
시름없이 조으는 듯 느껴지리라
오늘밤처럼 달이 달무리 속으로 숨어든 채
침침히 저무는 날
통째로 가슴이 멍들다
바스러지듯 별리의 순간이 지난 지금
갑절 더한 고통으로
통째로 가슴이 멍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