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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가족 인터뷰 ㅣ 김제훈 학생의 엄마
게시물ID : sewol_385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wjdrb81
추천 : 16
조회수 : 70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12/23 1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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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이면 “일어나라, 일어나” 제훈이 제영이 깨우는 소리, 설거지 소리, 찌개 끓는 소리가 들리는 집이었어요. 근데 이제 애가 움직이는 소리, 엄마가 말하는 소리, 그런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없어요. 전에는 집에 있을 때 음악을 거의 하루 종일 틀어놓고 있었거든요.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쫙 꿰고 있었죠. 그런데 이제 전혀 음악을 듣지 못해요. 애들이 힘들게 갔는데 엄마가 돼서 음악이나 듣고 있구나 싶어서 미안해서… 음악을 들으면 즐거워야 하는데 이제 음악 들으면 힘들게 간 우리 애들 생각이 먼저 나요. 어쩌다 나도 모르게 라디오에서 들었던 음악을 흥얼거리다가도 그게 도로 쏙 들어가요. 아, 이게 아니지 하고.

 

저는 작은애가 있으니까 이제 마음을 잡아야지 생각한 거지… 진짜 외동딸 외동아들 둔 부모들은 너무 힘들겠구나 싶더라구요. 잡을 게 없잖아요. 뭘 해야 할지 몰라 하염없이 마음을 못 잡을 것 같아요. 애들한테 화내고 짜증내고 뭐라고 했던 것도 하나의 재미라고 해야 할까요. 애들하고 주고받던 그런 것들이 전부 인생의 즐거움이잖아요. 그게 송두리째 없어진 사람들은 진짜 무얼 갖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가족 중에는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나가는 게 힘든 사람이 많았어요. 그래서 딴 생각을 하기도 하고. 우리 반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래선 안 되는데… 길 가는데 차가 우회전을 하고 있더라구요. 쌩하고 차가 들어온다는 걸 아는데 걸음이 멈춰지지 않았어요. 차가 급정거했죠. 눈물이 나더라구요. 내가 한순간 나를 버리고 ‘그냥 이렇게 살면 뭐해’ 그러는 거죠. 근데 생명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자살 같은 거 생각하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나를 내치고 몰아가는 거예요. 내 삶을 운영하는 게, 살아간다는 게 굉장히 큰 힘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노래를 들어도 예쁜 꽃을 봐도 눈물만 나요. 웃고 있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낯설고 저만 뚝 떨어져나와 혼자가 된 것 같아요. 제훈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요? 무슨 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까요?

 

4월 16일에는 제가 몸이 아파서 누워 있었는데 아침 9시 15분에 문자가 왔어요. “엄마, 저 큰일 났어요.” 그래서 제가 “왜, 제훈아” 답을 보냈더니 “아니에요” 하고 답장이 왔어요. 그래서 제가 바로 전화했죠. 제훈이가 “엄마, 배가 기울었어요. 그래서 제 캐리어가 저기 멀리 미끄러졌어요” 그래요. 제가 “그래? 어떻게?” 걱정을 했더니 제훈이가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하늘에서는 헬기가 돌구요. 구명조끼 입고 있고 바다에는 구명보트도 있어요” 하더라구요. 제가 “그래 제훈아, 알았어. 긴박한 상황인 거 같은데 엄마가 전화하면 안 될 것 같애. 엄마가 전화 안 할 테니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어”, 그러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선생님이 “제훈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저는 제가 전화를 길게 하고 있으면 제훈이가 신경 쓰느라 오히려 더 복잡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빨리 전화를 끊었거든요. 제훈이가 가고 난 다음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 전화를 다시 해볼 생각을 안 했을까?’

전화를 끊은 다음에 외출하려 했던 거라 그 상황에서 제가 머리를 감았어요. 애 전화를 받고 설마하면서 머리를 감았어. 어쩜 그렇게 여유롭게 머리를 감았을까, 어떻게 엄마가 돼 갖고 이렇게 천연덕스러울 수가 있을까.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런 상황은 생각을 못했죠.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다 생각했던 거죠. 이렇답니다, 엄마라는 사람이.

 

팽목항에 갔을 때 사실 처음에는 아이가 없다는 걸 인정을 못했어요. 제가 평소에 조용조용한 편이에요. 근데 아이가 없다니까 마음이 북받쳐 끓어오르는데 주체를 못하겠더라구요. 그렇게 큰소리로 울어본 적이 없어요. 제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전에는 생각 못했어요. 처음에는 애들이 어떻게 죽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떤 식으로 죽었을까. 엄마, 아빠를 불러가면서, 사랑하는 사람들 불러가면서 그렇게 죽었을까.’ 한참 지나고 난 다음에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애들이 이 사회를, 나라를 믿고 사람들을 믿고 있었는데 애들이 죽어갈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애들이 배신감과 상처를 안고 죽었겠구나…

 

제훈이는 4월 23일에 138번째로 나왔어요. 장례 치르는 동안 전주에 계신 친정 엄마가 안산에 왔다 갔다 하셨어요. 삼우제까지 지내고 난 다음에 친정 엄마가 몸이 편찮으셔서 안산에 오래 있을 상황이 아니었어요. 친정 엄마 입장에서는 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아이 유품을 정리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나봐요. “네가 언제 이걸 정리할 수 있겠냐. 어떤 마음으로 정리를 하겠냐. 엄마가 해줄 건 해주고 가야겠다.” 책하고 옷을 정리하고 태울 건 태우시고, 저는 엄마 말에 따랐어요. 아직은 유품을 정리할 때가 아닌데 나중에 너무 서운할거라는 생각은 했어요. 근데 엄마가 강경하게 나오고 엄마의 뜻에 따르는 것도 효도인 거 같아서 그렇게 했어요. 근데 후회가 되는 거죠. 제훈이를 너무 빨리 떠나보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장이 휑한 것도 서운했고 제훈이 옷장이 빈 것도 서운하더라구요. 학교에 갔더니 수학 선생님이 제훈이가 정리한 노트를 보여주더라구요. 꼼꼼하게 별표도 치고 정리해놓은 거 있죠. 그것만 갖고 있어요.

그래서 제훈이 앨범을 새로 정리했어요. 아기 때부터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사진을 모아놓은 앨범은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 정리를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그동안 하지 못한 사진을 새로 한꺼번에 다 정리해버렸어요. 제 컴퓨터에 있었던 제훈이 사진은 언제인가 다 지워져버려 친척 동생들 사진기에 있던 사진을 다 받아왔어요. 사실 애가 이렇게 떠나고 난 다음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엄마 욕심이죠. 그래도 조금이라도 애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어서. 애 사진 나온 거 하나라도 반갑고 해서.

제훈이가 어린 사촌동생들을 그렇게 잘 돌봤더라구요. 사진 보면서 얘가 장남, 장손이어서 어려움이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동생뿐 아니라 사촌동생들까지 돌보느라 ‘어휴, 얘가 재미나면서도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더라구요.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이 인생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애가 앨범 두개도 못 채우는 인생을 살았구나. 애가 얼마나 꽃다운 나이에… 엄마 아빠하고 겨우 이제 대화가 되기 시작하는 때에… 정말 만지고 또 만져도 너무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기록 및 재구성: 이호연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 ㅣ 김제훈 학생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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