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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대, 꽃
눈으로만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류시화, 여섯 줄의 시
너의 눈에 나의 눈을 묻고
너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묻고
너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묻고
말하렴,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말을
말하렴, 네 숨 속에 숨은 진실을
말하렴, 침묵의 언어로 말하렴
안미옥, 여름의 발원
한여름에 강으로 가
언 강을 기억해내는 일을 매일 하고 있다
강이 얼었더라면, 길이 막혔더라면
만약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아주 작은 사람이 더 작은 사람이 된다
구름은 회색이고 소란스러운 마음
너의 얼굴은 구름과 같은 색을 하고 있다
닫힌 입술과 닫힌 눈동자에 갇힌 사람
다 타버린 자리에도 무언가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쭈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바닥을 뒤적일 때
벗어났다고 생각했다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한쪽이 끊어진 그네에 온몸으로 매달려 있어도
네가 네 기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김이듬, 이 여름의 끝
한국학 연구소 입구에 국화 화분이 놓였다
엄청나게 만발한 두 개의 화분이 사원을 지키는 사자처럼 있다
방금 소장과 직원들이 낑낑대며 사 들고 왔다
국화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
독일인 학생들과 선생들은 한국인이 지르는 탄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꽃이건 소쩍새건
아는게 약이든 병이든
몰라도 가을은 온다
동시에 이 순간 여름이 끝났다
독일 달력에도 여름의 끝이라고 적혀 있다
꼭 그래야 하나
열일곱 밤쯤 자고 나면 떠나야 한다
교환교수로 온 선생은 입원해 있다
하이델베르그 광장 근처에서 신호를 무시한 채 건널목을 덮친 트럭에 치여 팔을 다쳤다
불행 중 다행이라며 그의 아내는 문병 간 우리를 오히려 안심시켰다
우리는 모두 기적적으로 남아
사소하게 여름의 끝을 지나간다
연구소 앞 자그만한 연못가에 앉아
한참 물 안을 들여다본다 손가락으로
물 위에 내 이름을 새긴다
몰라도 바람이 분다
왜 오는지 몰라도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렇게 지나가리라
내가 머물렀던 흔적도
네 마음에 물결쳤던 이 여름의 노래도
이승희, 여름 편지
있잖아요
내 발목이 어디로 흘러갔나 봐요
바람이 부는데 나는 자꾸만 계몽되고 있어요
착하고 온순한 구름으로 만들어지는 걸 보고 있어요
한때 나라고 생각했던 슬픔들이 구름 속에서 잘 자라죠
개종한 나무들은 새로운 골목에서 자라겠죠
이 계절은 그래요
모든 끝이 간지러워서 아무 데나가 여기가 되어 꽃피곤 하죠
창문에 엽서들이 흔들리며 모든 풍경이 빵처럼 부풀고 있죠
잡담들이 뜨거워지고 나는 나를 나로 둘 수가 없어요
이건 질문도 대답도 아니에요
어쩌다 이렇게 많은 골목이 생겼을까요
새로운 길만큼 폐허는 융성하겠지요
지리멸렬이 비로소 자유로워지겠고요
그해 여름의 골목에서 기차를 기다리겠지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죽어가겠지요
보고싶군요 여름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