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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리, 도돌이표
천장 구석에서 막 부화한 투명 나비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어요
부딪히기 싫어 몸부림을 쳐 보지만
손끝 하나 움직여지지 않아요
내게로 돌진하는 그들의 날갯짓은 격렬한데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요
그냥 나를 통과하네요
당신과 아무리 부딪치고 부딪쳐도
마찰음을 들을 수가 없어요
그 침묵의 주름을 더듬다 보면
어느새 내 손꽅은 촉촉이 젖어 있어요
당신 몸에 계속해서 단추를 다는 꿈을 꿨어요
그 단추들을 끼울 곳을 찾지 못해
결국 당신은 나를 통과하는데
나는 당신을 통과할 수 없는 건가요
단 한 번도 피곤하단 말을 하지 않았던 당신
도대체 피곤하단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되풀이되는 오선지 위에서
훌쩍 뛰어내릴 수 있을까요
흘러가는 굴뚝에서 흘러나오는
당신의 눈물
영원히 타지 않는 그 구멍이
내게로 번지는 그날
내가 살포시 가 앉게 될 꽃잎은
또 다시
무슨 색깔일까요
김선재, 안개 속의 거짓말
나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실패한 봄이 나를 지나간 후였다
꽃이 혼자 지던 날
무게중심은 어디서나 숨길 수 없다
저기 막 사라진 사람들
고개를 숙인 사람들
앞 축이 닳은 신발을 신은 사람들
치욕 같은 맨발을 내 보인 사람들
울고 있는 동안은
눈물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미 나를 지나간 내 거짓말
나는 가볍고
구름은 금세 몸을 바꿔 흩어져
한 번도 우리는 우리를 관통한 적 없었다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막 안개를 지나온 것이거나
안개와 섞여본 적이 없음을 알았을 뿐
지나가던 눈물을 훔쳐 살 뿐
그리하여 매번 너무 늦게 울었거나
안개에 얼굴을 묻는
발 없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한영미, 하늘의 질감
닿을 수 없는 하늘은 그대처럼 멀다
늘 머리 위에 놓여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지만
만질 수 없다
멀리 놓인 것들을
꽃이라 말할 수 없음을 용서하시라
사랑은 보퉁이처럼 가슴에 껴안고
어디든 함께 달려갈 수 있어야 하는 것
그 안에 담긴 것이
낡고 초라한 옷 몇 벌에 불과해도
따뜻하게 서로의 체온을 데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설령 가시식물이라 할지라도
멈칫대거나 도망치지 않고
손으로 꽉 움켜쥘 수 있어야 붙잡을 수 있는 것
남는 것은
가시에 찔린 상처뿐이겠지만
그것이야말로 꽃이다
김동규, 너무 많이 사랑해버린 아픔
딱, 고만큼만 사랑하려 했었다
때로는 잊고 살고 그러다 또 생각나고
만나서 차 마시고, 이따금 같이 걷고,
그리울 때도 있지만 참을 수 있을 만큼
고만큼만 사랑하려 생각했었다
더 주지도 말고 더 받지도 말고
더 주면 돌려받고 더 받으면 반납하고
마음 안에 그어 놓은 눈금 바로 아래 만큼만
나는 너를 채워두리 마음먹었다
우연히 주고 받은 우리들의 생각들이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 수 있느냐고,
약속한 듯 마주보며 행복하게 웃을 만큼
고만큼만 너를 사랑하려 했었다
너의 안부 며칠째 듣지 못 해도
펄펄 끓는 열병으로 앓아눕지 않을 만큼
고만큼만 나는 너를 사랑하려 했었다
딱, 고만큼만
딱, 고만큼만
류시화, 너의 묘비명
너의 묘비명인
나, 여기에 서 있다
너는 내 두 눈에
이름 석자를 새겨 놓고 눈부시게
날아갔구나
차라리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너, 바람의 기억속에 묻히고
너의 묘비명인
나, 여기에 홀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