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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5일, 사직 야구장을 회고하며.
게시물ID : baseball_934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카엘대공
추천 : 5
조회수 : 95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5/09 03:30:23

 내가 야구를 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9월 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최훈의 [클로저 이상용]을 접한 뒤 그를 계기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야구경기를 처음 보기 시작했으니. 다만 그때는 지금처럼 팀을 정해놓고 응원하는 게 아닌, 그냥 아무 팀이나 찍어놓고 경기 보는 거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호감이 가는 팀은 몇몇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넥센 히어로즈였다. 왜 얘네가 좋았는지는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나는 보통 언더독을 빠는 스타일인데, 당시 넥센은 우승다툼을 하고 있던 시점이었으니. 다만 굳이 따지자면 구단주 이장석을 위시한 서건창, 박병호 등 주요 선수들의 인생사에서 느껴지는 '처절함' 이 내 마음에 어느정도 와닿지 않았나 하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정말 좋아하니까.

 각설하고, 그 날 역시 나는 밥 먹고 기숙사로 들어가 생각난 김에 야구중계를 틀어서 보고 있었다. 넥센과 롯데의 경기였는데, 정규시즌 끝자락 경기라는 점 외에도 이 경기는 봐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인간승리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무명의 신고선수에서 크보 MVP 후보로 일약 발돋움한 서건창의 200안타 여부가 걸린 경기였기 때문이다.

 서건창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를 알기 위해선 먼저 야구의 신고선수 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야구선수들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프로 야구팀 중 하나가 그들을 지명하면 가서 계약을 맺고 입단하는 식으로 프로에 입문한다. 혹은 아예 대학교에 진학해 그곳 야구팀에서 좋은 실적을 낸 뒤 지명을 받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라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지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이때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신고선수라는 제도다. 계약금 없이, 연봉은 최저수준인 2000만원 정도만 받고 야구를 하는 선수들. 구단 입장에선 터지면 좋고 안 터져도 그만인, 그냥 혹시나 하는 기대치에 로스터에 이름만 올려놓는 쩌리들인 셈이다.

 서건창은 바로 이 신고선수 출신으로 자신의 프로야구 커리어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 지명을 받지 못했고, 집안에 돈이 없어 대학교 진학도 어려웠기에 신고선수로 일찌감치 자립을 시도했던 것이다. 다행히 자질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기에 1군에서 기회를 부여받기도 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 경기를 시원하게 말아먹으며 결국 다시 도로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출. 재기를 위해 한화 등 다른 구단의 문도 두드려봤지만 전부 퇴짜를 맞았고, 설상가상으로 경찰청 야구단 입대 신청에서도 서류심사 단계에서 문전박대당했다. 하는 수 없이 현역으로 입대해 2년 동안 푹 익고 나자, 제대한 그에게 남은 건 '23살 무직'이라는 이 시대 흔하디흔한 실패자의 꼬리표 뿐이었다.

 사회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져 한치 앞도 안 보이던 그 때, 서건창에게 희미한 한 줄기 희망이 내려왔다. 당시 신생 구단이었던 NC와 넥센에서 입단 테스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는 고심 끝에 넥센으로 가 테스트를 받았고, 한 번 맛본 실패를 바탕으로 한 독기와 처절함으로 결국 두 번째 기회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시 입단 테스트를 책임졌던 감독 말로는 수많은 지원자들 중에 서건창 혼자만 "눈빛이 달랐었다" 고 한다. 평소 보고서에 사견 따위 적지 않았던 그는 그 날 서건창에 관해서만큼은 이례적으로 "2000만원만 써보자" 라는 의견을 적어 보냈고, 이장석은 이를 바로 승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투자한 2000만원은 KBO 역사에 길이 남을 교타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이 서건창 선수의 팬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난 애초부터 '넥센 히어로즈'가 아닌 '서건창'이란 선수 개인을 좋아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의 성공 뒤에 숨겨진 수많은 좌절, 그리고 그 모두를 극복한 그의 초인적인 의지력을 나는 사랑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해 가을 전인미답의 역사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기존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인이었던 196안타를 넘어, 아무도 찍지 못했던 200안타의 고지를 향해. 이 감동적인 행진을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날, 2014년 10월 15일 경기가 시작된 시점에서 그의 안타수는 198개였다. 그리고 5회 초 그는 기습번트를 댄 뒤 1루로 전력 질주해서 세이프 판정을 받아냈다. 기록원의 기록에 의하면 내야 안타. 드디어 200 고지까지 안타 한 개만을 남겨놓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8회 초, 그는 다시 타석에 섰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투수가 던진 볼은 파울 포함해서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이렇게 걸러버리고 끝나나 싶었던 무렵 스트라이크가 들어왔고, 서건창은 그 공에 헛스윙을 했다.그리고 맞이한 투-쓰리 풀카운트 상황. 투수는 6구째를 던졌고, 서건창은 쳤다. 공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

 일반적인 이야기 숙명론에 따르면 여기선 안타가 나와야 할 시점일 것이다. 근데 이게 왠걸. 공은 힘없이 날아가더니 유격수 글러브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난 실망한 채 중계를 끄고 걍 읽던 라노벨이나 다시 읽기 시작했다. 8회에 안타를 때리지 못한 이상 이번 경기 내에 200안타가 나올 확률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틀 뒤 SK전 할 때 다시 컴퓨터를 틀었고, 서건창이 대망의 200번째 안타를 때려내는 것을 보았다. 내가 환호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뭐 이딴 맥아리없는 글이 있냐고 황당해하실 분들. 당연하지만 여기서 끝은 아니다.

 수시 접수가 끝나고 대학 합격 결과까지 발표된 뒤, 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딱히 야구 자체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있던 건 아니어서, 서건창이 MVP 따는 걸 본 순간부터 열의가 급격하게 식어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시범경기도 잊고 클로저스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김성근 감독이 한화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4월부터 경기를 보기 시작해 지금은 한화야구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었다.

 엔하위키에 야구 관련 항목이 꽤나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걸 알아챈 것도 근래부터였다. 처음에는 한화 관련 항목만 읽었지만 읽다 보니 옛날에 빨던 넥센 생각도 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방금 3시간 전엔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서건창 선수의 2014년 활약 항목에도 처음 접속했다. 그리고 2014년 10월 15일 그 날, 8회 초 타석에서 서건창을 상대했던 투수의 이름이 이정민이라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이정민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마 골수 야구팬이라면 본명보다도 "허용투수"라는 별명으로 그를 더 잘 기억할 것이다. 한때 국보급 타자로 칭송받았던 이승엽이 한국 역사상 최초로 56홈런을 기록했던 날. 바로 그 날 이승엽을 상대하고 홈런을 얻어맞았던 투수가 이정민이었다. 그리고 뉴스에선 그를 비추며 다음과 같은 자막을 띄웠다. "56호 홈런 허용 투수".

 사실 운 나쁘게 홈런을 얻어맞았을 뿐, 당시 이정민은 꽤 호투한 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날은 그가 프로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승리투수가 된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개인적인 영광은 "56호 홈런 허용 투수"라는 희극적인 별명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11년이 지나고, 파릇파릇했던 청년 투수가 불펜의 최고참이자 가장 믿을맨이 된 뒤에도 그의 별명은 여전히 "허용투수"였다. 오죽하면 이정민이라는 진명보다도 허용투수 내지는 허용갑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였으니.

 단어 하나가 존재를 정의하는 삶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 아무리 발버둥치고 커리어를 쌓아도, 본명보다 조롱 섞인 별명 쪽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은 사람은 과연 평소에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 절망을, 고독감을 나는 감히 측량할 수가 없다. 그건 어쩌면 부진이나 부상보다도 탈출하기 어려운 끔찍한 지옥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11년 동안 공을 던졌다.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하고, 오직 농담 소재로만 이리저리 굴러서 더럽혀진 채.

 그리고 2014년 10월 15일 넥센 대 롯데전 8회 초, 공교롭게도 바로 이 허용투수 이정민 씨는 서건창의 200안타 여부를 결정짓는 타석에서 마운드 위에 서게 되었다. 사실 원한다면 거르는 것 자체는 가능했다. 투아웃 상황인데다가 상대는 크보에서 안타율이 가장 높은 괴물이었으니 볼넷을 주는 건 결코 나쁜 선택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쓰리볼을 내준 뒤에도 꾸역꾸역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던졌고, 결국 풀카운트 상황까지 왔다. 그리고 마지막 6구를 던졌다.

 그대로 힘없이 하늘 높이 뻗어, 유격수 글러브 속으로 들어갔던 그 공. 내가 본 뒤 중계를 꺼버렸던 그 공을 보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프로 데뷔 첫 무대에서부터 11년차 베테랑이 된 그 시점까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던 "허용투수" 라는 꼬리표. 그 앞에 "서건창 200안타" 라는 수식어마저 덧쓰여질 뻔한 상황에서, 그 공포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해 떨쳐내는 데 성공한 그는, 과연 그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나도 사실 내가 왜 굳이 이제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진 모르겠다. 대체 6개월 전 이 사소한 이야기가 뭐가 그리 감회로워서 3시까지 잠도 못 자고 이러고 있는 걸까. 심지어 난 과거 넥갤, 롯갤, 엠팍 기록까지 뒤져서 당시 시청자들이 남겼던 소감을 일일이 찾아 읽기까지 했다. 여담이지만 그 글 대부분은 트라우마를 떨쳐내고 대타자에게 당당히 맞선 이정민의 담대함을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당한 입장인 넥센 히어로즈 갤러리의 글들마저도!

 그런 대통합을 봐서일까, 난 지금 상당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다. 내가 당시 짜증을 내면서 껐던 그 평범한 이닝에 그런 이면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에. 그 날 그곳에서도 역시 조용하지만 의미 깊은 기적이 일어났었다는 점에 대해. 그 기적은 서건창의 200안타 달성 때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분명 누군가의 일생에 걸친 울분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지금이라도 알았다는 사실에 난 가슴이 벅차오르는 고양감을 느낀다.

 2014년 10월 15일 그 날, 사직 야구장에선 두 남자의 삶을 짊어진 맞대결이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장면을 담은 아래 사진을 내가 살면서 본 야구 장면 중 가장 감동적인 명장면으로 여기고 있다. 이는 설령 한화 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이정민이 꽂아넣었던 6구째야말로 나는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불꽃이라고 생각하니까.


출처 오늘 본인 블로그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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