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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밀림
누군가의 손이 한 사람의 손안으로 들어가
악의 없이 주먹을 쥘 때
동그랗게 말린 허공의 밀도는 낡은 지구본을 닮아 간다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너무
아프지 않을 만큼
주먹을 감싸는 사랑은 떠받치는 쪽보다 누르는 쪽을 더 섬세하게 여행하고
지명(地名)을 알 수 없는 소도시를 돌아
서로를 일주한 연인들의 방명록을 넘겨 볼 때
명사보다 동사가 많았던 페이지에선 또 다른
생애를 맞이하는 세계의
이면이 드러난다
아프지 않을 만큼만 당신을 후려치고 싶어
주먹이 빠져나간 저녁마다 옅은 멍 자국이 맺힌 가로등이 켜진다
멈춰 선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당신과 빈 곳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이
주먹을 쥔 채 외투에 찔러 넣은 것들은
눈물보다 습한 밀림을 이룬다 안쪽은 왜
곁이 없는 오지로 남는 것인지를
이장근, 이별
이별은
별이 되는것
이 한 칸 띄우고 별
한 칸, 그래
한 걸음 멀어졌을 뿐이다
그 별도 아니고
저 별도 아니고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빛나는 별
너는 나의
별이 되었을 뿐이다
최정례, 팔월에 펄펄
팔월인데 어쩌자고 흰 눈이 펄펄 내렸던 걸까
어쩌자고 그런 터무니없는 풍경 속에 들었던 걸까
창문마다 흰 눈이 펄펄 휘날리도록
너무 오래 생각했나 보다
네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되도록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하나가 되어 이젠
얼굴조차 뭉개지고
눈이며 입술이며 머리카락이며
먼지 속으로 흩어지고
비행기는 그 폭설을 뚫고
어떻게 떠오를 수 있었을까
소용도 없는 내 조바심
가닿지도 않을 근심을 태우고
오늘은 자동차에 물건들을
밀어넣고 차 문을 닫았는데 갑자기
열쇠가 없었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망치 소리 같은 게
철판을 자르는 새파란 불꽃 같은 게
나를 치고 지나갔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길을 되짚어 다니면서 물었다
무엇이 할퀴고 지나간 다음에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달리는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면서
바람도 없는데 서 있던 나무는
갑자기 이파리를 부풀어 올리고
그때 어쩌자고 눈발은 유리창을 때리며 나부꼈나
세상에 열쇠라는 것은 없다
가방도 지갑도 머릿속도 하얗게 칠해지면서
여름의 한중천에서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최문자, 청춘
파랗게 쓰지 못해도 나는 늘 안녕하다
안녕 직전까지 달콤하게 여전히 눈과 귀가 돋아나고 누군가를 오래오래 사랑한
시인으로 안녕하다
이것저것 다 지나간 재투성이 언어도 안녕하다
삼각지에서 6호선을 갈아타고 고대 병원 가는 길
옆자리 청년은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청년이 파랗게 보였다
연두 넝쿨처럼 훌쩍 웃자란 청춘
우린 나란히 앉았지만 피아노 하얀 건반 두 옥타브나 건너뛴다
난삽한 청춘의 형식이 싸락눈처럼 펄럭이며 나를 지나가는 중이다
안녕 속은 하얗다
난 가만히 있는데
다들 모르겠지
한 부분에 정신 없이 늘어나는 눈물
구르지 않고 사는 혀
아무도 엿보지 않는데
그렇게나 많이 나를 증명할 필요가 있나
가방 속에 읽다 만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꺼내 나도 읽고 싶었지만
그냥 있었다
모두들 나를 두고 그냥 내렸다
청년도 나를 잊고 그냥 내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설마, 하던 청춘이 일어나서 나를 열고 그냥 나갔다
고대 앞에서 들뢰즈를 들고 내릴 때
사람들이 하얀색으로 흔들리는 내 등을 보고 있었다
이장욱, 점성술이 없는 밤
별들은 우리의 오랜 감정 속에서
소모되었다
점성술이 없는 밤하늘 아래
낡은 연인들은 매일 조금씩 헤어지고
오늘은 처음 보는 별자리들이 떠 있습니다
직녀자리
전갈자리 그리고
저기 저 먼 하늘에 오징어자리가 보이십니까?
오징어들
오징어들
밤하늘의 오징어들
말하자면 새벽 세 시의 아파트에서
밥 말리를 틀어 놓고
혼자 춤추는 남자
말하자면 지상의 모든 개들이 고개를 들고
우우우 짖는 밤에
말하자면 빈 그네가 쇠줄 끝에서
죽은 아이처럼 흔들리는 밤에
말하자면 별빛 같은 집어등을 향해 나아가는
외로운 오징어들의 밤에
그런 밤에
별들은 어떻게 소모되는가?
오징어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새벽 세 시의 지구인들과 함께
음악도 없이
점성술도 없이
보이지 않게 이동하는 은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