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3년차에 접어드는 박근혜 정부가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재벌 기대기’에 나서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 초반까지만 해도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를 핵심 정책기조로 내세웠고, 지난 7월 최경환 경제팀 출범 뒤에는 ‘가계소득 증대’도 강조했다. 그러나 하반기 이후 세계경제 둔화와 가계소득 정체로 수출과 소비가 수렁에 빠지자, 또다른 성장 축인 기업 투자를 유도하는 데 올인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28일 국무총리실 산하 국무조정실이 ‘규제 기요틴 민관합동회의’를 연 뒤 발표한 규제 개선 추진방안은 재벌 대기업에 가장 큰 혜택이 돌아간다.
지주회사 규제 완화
적은 자본으로 계열사 설립 가능
기업들의 핵심 민원 사항 중 하나
공시제도 일부약화
단일판매·공급계약 공시 의무 폐지
일감몰아주기 내부거래 알수 없게돼
취약 재무구조 재벌 규제완화
채권단 감시 회피 여지 커져
산업 전반적으로 위험도 상승 정부가 주요 경제 규제완화 사례로 앞세운 지주회사 규제(공정거래법) 완화는 재벌 대기업들의 핵심 민원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재벌그룹이 공동출자법인 또는 비상장 중소·벤처기업에 출자하는 경우에 한해 지주회사 증손회사 지분 요건을 완화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100%인 증손회사 지분 요건을 앞으로는 50%로 줄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벌 대기업들은 적은 지분율로 계열사 소유는 물론 문어발식 확장을 통한 세불리기도 가능해진다. 정부는 지난해에도 에스케이(SK)와 지에스(GS)의 요구를 받아들여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지주회사 규제를 대폭 완화한 적이 있다.
시장을 통한 재벌그룹 감시·견제의 주된 도구로 활용됐던 공시 규제도 완화된다. 내년 3월부터는 일정한 기준에 미달한 종속회사의 경영상황 등은 사업보고서 등 정기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아도 된다. 투자자 입장에선 재벌그룹 경영 전반을 훑어볼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또 그룹 계열사 등 다른 기업과의 대규모 판매나 공급 계약을 맺은 기업이 계약 진행 상황을 연 1회 공시하도록 한 규제도 없어진다. ‘단일판매·공급계약 공시’가 완화되면 일감 몰아주기 등 그룹 내부거래가 대폭 활성화되면서 경제력 집중 현상이 심화될 우려가 커진다.
취약한 재무구조를 지닌 특정 대기업 그룹이 구조조정 압박을 덜 수 있는 규제완화도 추진된다. 주채권은행 등이 주채무계열(주로 재벌그룹) 재무구조 평가 때 산업별 특수성을 고려해 항목 평가 때 가점을 두 배 이상(2점→5점) 높여주기로 했다. 한진·현대그룹 등 건설·해운·조선업종에 속한 재벌그룹이 채권단의 감시를 회피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면서 산업 전반적으로 위험도가 높아지고 금융기관의 건전성은 위협받게 된다.
정부는 이러한 재벌그룹 ‘민원’에 기초한 규제개혁을 빨리 마무리하겠다는 입장이다. 추경호 국무조정실장은 “개선을 확정한 과제들은 법령 개정 등의 후속 절차를 속도감 있게 추진해 늦어도 내년 상반기 중에는 모두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내년 상반기’라는 시한을 둔 만큼 앞으로 과제별 국회 논의나 공청회 개최 등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부실하게 이뤄지면서 “밀어붙이기식 규제완화”라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일부에선 재벌 특혜성 규제완화가 이번에 발표된 과제 말고도 추가적으로 나올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정부의 재벌 규제 완화 행보가 부쩍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2015년 경제정책방향’에는 재벌그룹의 사업 재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정거래법이나 상법 위반 행위의 책임을 면해 주거나, 사업·자산 양수도(M&A) 과정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해 과세를 이연시키는 방안 등이 담겨 있었다. 최근 삼성그룹과 한화그룹 간 화학·방위산업 부문 양수도 계약에서 보듯이 재벌그룹 간, 또 그룹 내 사업 재편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 최근 재벌그룹이 계열 금융회사 최고경영자에 금융 무경험자를 앉히는 ‘총수(오너) 낙하산’을 막기 위해 도입하려 했던 금융회사 지배구조 관련 규제 도입이 유예됐고, 올해 말까지 도입하기로 했던 독립신용평가제도도 유예됐다. 새누리당과 정부 등 여권 핵심부에서는 불법 행위를 저질러 구속된 대기업 총수의 가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정부가 경기 활성화를 명분으로 재벌에 대한 규제를 풀고 근본적인 구조조정은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