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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에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게시물ID : science_447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나토스
추천 : 54
조회수 : 16528회
댓글수 : 82개
등록시간 : 2014/12/31 21:00:10
식탁에 둘러앉은 귀족 가족들. 스프와 샐러드, 스테이크에 이르기까지 메뉴가 차례로 서빙되고, 각각의 자리엔 포크와 나이프가 가지런하게 놓여있습니다. 이세계에서 건너온 우리의 주인공은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어 먹습니다. 오! 이거 꽤 맛있네요. 풀코스를 대접받은 주인공은 디저트를 먹으며 식사를 마칩니다.

이른바 판타지 소설에 흔히 나오는 귀족들의 식사입니다. 하지만 판타지의 배경을 중세(5세기~15세기중엽)시대로 본다면, 당시의 유럽 귀족들의 식사방식은 오늘날과 꽤 달랐습니다. 취향도 많이 달랐구요. 유럽의 식습관이 오늘날과  비슷해진 것은 16~17세기 경 프랑스에서 음식개혁이 일어나면서 입니다. 
그렇다면, 중세시대 귀족들의 식사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1. 레스토랑 하면 떠오르는 풀코스 서빙방식은 19세기부터
  보통 우리가 프랑스식 서빙방식이라고 알고있는 <한접시씩 차례대로 서빙하는 방식>은, 사실 러시아식 서빙입니다. 이는 19세기에 프랑스를 통해 각국으로 퍼져나갔지요. 그 이전에는 마치 중국식 식사처럼, 메뉴들이 커다란 접시에 담겨 한꺼번에 식탁에 배치되었습니다. 물론 커다란 식탁에 전부 고르게 요리를 배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석에는 고급요리가, 말석에는 그에 맞는 요리가 배치되었지요. 만약 말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상석에 배치된 요리를 먹고싶다면 시종이 와서 덜어주길 기다려야했고, 사람이 많으면 차례를 기다려야하기에 음식이 식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꽤나 불합리한 방식이지요.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날씨가 매우 춥기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서빙했다간 음식이 기다리고말고도 없이 금세 식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순서에 따라 바로바로 주방에서 한접시씩 준비해오는 서빙방식을 채택하게 되었지요. 이게 현재 레스토랑에서 사용되고 있는 풀코스 서빙방식입니다.

2.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외에는 먹을 수 없었다
  밀가루를 사용한 면 요리, 파스타는 이탈리아에서는 자주 먹었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보통 유럽지역에서 밀가루의 용도는 빵과 스튜 정도였지요. 파스타가 유럽지역에 전파된 것은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인 무려 19세기 이후였습니다. 아직 쿠키나 케이크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던 시기였기에 당시에는 밀가루를 이용한 요리가 그리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3. 포크? 나이프? 그런거 없다!
  맨손식사 라고 한다면 인도나 동남아 지역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유럽지역도 무려 16세기정도까지는 맨손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식탁엔 늘 손을 씻기 위한 물이 담긴 볼이 있었지요. 앞서 말했듯이 음식은 커다란 접시에 담겨 서빙되었고, 가장 고급이라 할 수 있는 고기요리는 보통 가장 상석에 배치되었습니다. 고기메뉴를 칼로 자르는 것은 굉장한 명예로 여겨졌기에 그 역할은 무조건 그 집안의 가장이나 장남이 맡았다고 하죠. 바꿔말하면 이미 잘라진 고기가 개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나이프는 큰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숟가락은 2만년전부터 발명된 유서깊은 식기이지만, 중세시대 때에는 국물요리를 뜨는 공용 국자 정도 말고는 스푼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스프는 그릇 채 들고마셨지요. 중세 유럽에서 숟가락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15세기) 입니다. 이는 종교적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중세 성직자들은 음식은 신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져도 되는 것은 인간의 손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포크는 훨씬 더 늦게 전파되었습니다. 면요리는 이탈리아에서밖에 사용되지 않았던데다가, 포크는 무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나마 15~16세기 경에 이탈리아에서 먼저 포크가 사용되었고, 16세기 후반부터 유럽인들이 점차 손으로 음식을 먹지 않게 되면서 포크가 서서히 정착되게 됩니다.
  오늘날과 같이 숟가락과 포크 라는 한 세트가 주어진 것은 18세기 경이었습니다.

4. 많이 먹어야 진정한 귀족이다!
  중세의 귀족들은 사냥한 동물을 먹는 것을 전사의 긍지로 여겼습니다. 카를 대제도 매일 야생동물의 꼬치구이를 먹었다고 하지요. 고기를 먹는 방식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육즙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주로 고기를 삶아먹었고, 귀족들은 정체성과 권력의 상징으로 구워먹었지요. 만약 큰 실수를 저지른 귀족에게는 <평생 고기 금지> 라는 벌이 주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즉 고기=귀족 인거죠. 
  또한 귀족들은 많이 먹는게 좋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식가가 아닌 자는 권력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유럽신화나 유럽설화에서는 신이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먹거나 먹기대결을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지요. 영주가 뚱뚱할수록 환영받았고, 비만은 부의 상징이었기에 프랑스의 루이6세는 하루에 8번이나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5. 색이 강렬하고 느끼할수록 좋다!
  중세의 궁정요리에서 가장 중시되었던건 첫번째가 양, 다음이 색과 향이었습니다. 맛은 논외였죠. 이슬람을 통해 동방의 향신료가 유입되면서, 귀족들은 특히 향신료에 열광하게 됩니다. 재료의 맛을 엄청난 향신료로 덮어버리는 것이 좋은 요리라고 생각되었죠. 게다가 칼라풀하게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여, 온갖 착색료와 향신료로 음식을 범벅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그런 요리가 나온다면? 맛도 완전 자극적인데다가 영양학적으로도 불합격, 색은 원색계열이니 시각적으로도 몸에 안좋아보였겠지요.
  당시의 맛은 단맛, 매운맛, 신맛의 3가지만 취급되었습니다. 짠맛은 단맛과 동일하게 취급되었죠. 짠맛과 단맛이 분리된 것은 위에서 말했던 음식개혁이 일어나면서 입니다. 
  현대인들이 맛있다고 할만한 요리는 15세기 이후 향신료의 유행이 사라지면서부터 입니다.

6. 먹지않는 연출요리, 앙트르메
  색과 향이 중시되었던 시대이니만큼, 먹기위해서가 아닌 장식하기 위해서 요리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앙트르메죠. 예를들어 학의 통구이, 빨갛고 하얀 물감을 칠한 고기, 살아있는 새를 가둔 단단한 파이, 와인이 뿜어나오는 분수 등입니다. 부르고뉴 궁전에서는 앙트르메가 십자군 참가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연회에 사용되었다고 하죠. 
  요즘으로 말하자면 <음식으로 장난치는> 행위였던 셈입니다.

7. 물보단 술을 더 자주 마신 중세인들 
  요즘도 그렇지만, 유럽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그다지 질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럽인들은 생수를 잘 마시지 않았지요. 하지만 커피는 18세기에, 차는 17세기가 되어서야 보급되었기 때문에, 물을 끓여마신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뭘 마셨냐구요? 바로 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맥주와 와인은 물 대용으로 취급되었고, 어린이도 맥주나 와인에 물을 타 마셨습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살짝 취해있는 상태가 기본이었지요. 목마를때마다 물이 아닌 술을 마셨으니까요. 유럽에서 차와 커피가 환영받았던 것도, 물을마신다=취한다 가 기본 공식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마셔도 정신이 멀쩡한 음료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옛날부터 깨끗한 물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꽤 축복받은 지역이라 할 수 있었던거지요.

8. 중세시대에서 야채도둑은 죄가 되지 않았다.
  고기가 최고라고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야채는 농민들의 음식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게다가 생야채는 손이 가지 않은 음식이라 하여 경원시되었습니다. 귀족들 중에는 평생 고기만 먹은 사람도 있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따라서 요즘같이 야채를 전문적으로 키워 파는 상인같은건 없었고, 각자 텃밭을 일구어 자기 가족이 먹기 위한 야채를 키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또한 마늘이나 양파 순무 당근 등 유명한 야채 정도를 제외한다면 당시의 야채는 모든 야생초를 의미하였고, 따라서 잡초를 뽑는게 죄가 아니듯 야채를 뽑아가는 것도 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즘엔 서양 음식의 기본 재료라 할 수 있는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토마토, 파프리카 등은 전부 15세기 후반에 대항해시대가 되면서 다른 대륙에서 가져온 식재료들입니다.
  귀족들도 제대로 야채를 먹기 시작한 것은 마찬가지로 16~17세기에 음식개혁이 일어나면서부터 라고 합니다.

9. 중세에는 독한 술이 없었다!
  중세시대에 술이라고 한다면 맥주와 포도주, 사과주, 벌꿀주 정도였습니다. 전부 도수가 매우 낮은 술이지요. 오늘날 럼주, 브랜디, 위스키 등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증류주는 11~13세기에 이탈리아의 수도원이 포도에서 리큐르를 제조하면서 <생명의물> 이라는 약품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즉 처음에는 술이 아닌 약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던게 15세기가 되면서 점차 유명해지고, 16~17세기에 일반화되게 됩니다. 썩지 않고 알코올도수 대비 부피가 작기 때문에 고가의 상품으로 유통되었습니다. 특히 대항해시대에서 럼주는 장거리항해에 썩지않는 음료로 환영받았지요. 도수가 낮은 술들은 물 대용으로 취급되던 시대에 독한 증류주는 진정한 <취하기 위한 술>로 생각되어졌습니다.
  참고로 동양에서는 서양보다 빠른 시대에 증류주(소주, 소홍주 등)를 만들어 마셨다고 합니다.

10. 그릇은 쓰지않는다. 빵이다!
  중세에서는 접시가 없었습니다. 로마시대에도 유리접시를 썼는데 뭔소리냐! 라고 하신다면, 물론 그들이 접시만드는 기술이 없어서 사용하지못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했던 식기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중세 기독교에서 음식에 그릇을 사용하는 것은 더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음식을 맨 바닥에 놓을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사용한게 <트랑쇼와르>, 바로 그릇 대용의 딱딱한 빵입니다. 일주일간 보관해 매우 딱딱해진 빵이죠. 아 물론, 국물요리를 담는 것은 별개였겠지요. 이건 접시가 아니라 냄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앞서 말했듯이 당시의 중세시대에서는 개인마다 음식이 서빙되었던 게 아니라 식탁위에 커다랗게 음식을 차려놓고 거기서 덜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접시가 없기에 개인접시는 사용되지않았고, 국물요리는 트랑쇼와르 위에 덜어낼 수 있도록 걸쭉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음식을 담으면서 점차 축축해진 트랑쇼와르는 다시 새 트랑쇼와르로 교체되었고, 음식 국물이 배어든 트랑쇼와르는 개나 빈민에게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트랑쇼와르를 베푸는 그릇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지요. 서민의 가정에서는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트랑쇼와르를 식사 가장 마지막에 먹었다고 합니다. 그마저 준비할 수 없는 빈민이라면 그냥 나무판에 먹었을테구요. 
  접시가 보급되기 시작한건 15~16세기부터라고 하네요.

11. 과자의 혁명은 16세기부터
  당시에 과자라고 한다면 프레첼, 비스켓 정도의 구운과자였으며, 빵과 과자는 동일하게 취급되어 빵 직인이 과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과자 길드가 만들어진 것은 1440년이었지요. 과자는 14~18세기에 걸쳐 프랑스에서 발전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귀족문화의 호화로운 식사에 의해 디저트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과자의 혁명은 16세기에 일어났는데, 그때야 비로소 설탕이 넉넉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설탕이 이슬람에 의해 독점되어 매우 비쌌었거든요. 16세기 이후 설탕이 유행하면서 온갖 과자들이 생겨났고, 단단한 설탕덩어리로 포크나 나이프를 만들어 식탁을 장식하는 유행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어떤가요? 중세시대의 식습관은 현재와 매우 다르지않나요? 판타지 시대에 나오는 식습관을 굳이 역사에 대조해보자면, 중세가 아닌 16~17세기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뭐든 짬뽕가능한게 판타지소설이지만 말이지요. 그래도 원래 중세 사람들이 어떻게 먹었나 생각해보면서 판타지소설을 읽으면 더 재밌지 않을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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