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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
게시물ID : history_93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rdien
추천 : 1
조회수 : 338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5/21 23:30:30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겸 언론인, 기업인, 민족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이자 서예가이자 

민주화투사. 독립유공자로 기록된 동시에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되어있고, 사후 건국훈장이 수여되었다.

하지만 어째 이런거 다 알려지지 않고 대강 친일파이자 동아일보 설립자란건만 유명하다. 세상일이 다 그렇지 뭐

인촌 김성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의 와세다 대학을 다닌후 귀국, 사립학교를 인수, 경영하였다.

이때 가장 유명한 일로는 3.1운동을 계획했고 자금을 지원한 일이 있다.

이후 그는 실력양성론을 주장하며 민족자본을 양성해야 한다는 이유로 경성방직회사를 창설, 운영하였다.

그는 또 동아일보를 창간, 운영하였고, 보성전문학교를 인수, 확장하여 운영하였다.

(이 보성전문학교가 바로 현재의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광복때 일제는 한반도내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와 교섭했으나 둘은 임정이 귀환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선생님이 이를 넘겨받아 전권을 위임받는 일도 있었다.

인촌 김성수는 건준과 임정의 갈등에서 임정을 지원하였고 이승만과 함께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대한민국의 부통령자리를 맡기도 했으나, 부산정치파동에 크게 분개하여 사표를 제출하고 물러난뒤

호헌동지회를 결성하여 반이승만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호헌동지회를 민주국민당으로 개편확대하고

통합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다. 이는 김성수 사후 이루어지는데, 그 당의 이름이 바로 민주당이다.




친일논란

역사학자들이 키배 설전을 벌이는 대표적인 인물.



1.독립운동

독립운동가 이강훈은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는 김좌진 장군에게 3백 ~ 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1만 원가량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고 하며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고하를 통해 

보낸 것이지. 1만 원이라면 그때 황소 1백 마리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으니 요즘 돈으로 수억대의 큰돈이지."라고 말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때 독립자금을 지원해주었다고 하며

또한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수만의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이건 안해도 됬을거 같은데) 하였다.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해주었다고도 한다. 한 증언에 따르면, 

독립군 자금책이 그를 찾아오자, 금고문을 열어놓고 화장실에 간다며 나간뒤 돌아오지 않았단다.


이후에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가기도 하였고 조선어학회를 비밀리에 지원해주어 일제에게 잡혀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독립운동을 하긴 했는데 죄다 안전한데에서

'나는 독립운동자금 지원한적 없음. 독립군놈들이 훔쳐간거임'

식으로 한거라 비판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증언에 따르면 김성수가 독립운동의 큰 자금줄이었던 건 맞는데 결국 자기는 어떻게든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이현희 교수님의 연구에 따르면 3.1운동은 거의 김성수가 주도했으나 자신이 이름을 올리면 회사가 망해버릴수가 있다고

끝끝내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조선어학회나 흥업구락부도 매우 비밀리에 지원해서 일제가 잡아가긴 했는데

원체 부자인 기업가라 영향력이 컸는데다가 증거가 없어서 독립운동때문에 고초를 당한 적이 없다.

사회적인 지위덕분에 김성수의 독립운동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위험이 크지 않았다고 볼수도 있다는것.



2. 친일행적

김성수는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뚜렷한 독립운동이 없었고 오히려 25편의 내선일체 찬양글과 학도병 권유문글을 썼다.

중일전쟁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라디오 강좌를 2일간 담당하기도 했고, 경성군사후원연맹에 1000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당시 김성수의 행적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김성수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일제가 작위를 주며 회유하려 하자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근데 딸의 증언에 따르면 총독부에게 재산은 받았다고 한다. 응?

당대 일본 관리들도 김성수가 애국자임을 알고 잇었다. 당시 정무총감이던 엔도 류사쿠의 증언에 따르면,

"김성수 군은 '나는 지금까지 민족주의자로서 살아왔다. 지금와서 그런 일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라며 거절했어요.

맨 처음 거론된 이가 인촌이었어. 인촌은 당시 누구의 눈에도 정말 훌륭한 사람으로 보였다고 생각해요."

최서면의 증언에 따르면 야기 노부오는 조선사람중 진짜 애국지사 한명만 뽑으라는 질문에

김구, 이승만도 아닌 인촌을 지적하며 그의 본심은 항일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학병 권유의 기사는 매일신보기자 김병규가 대필해주었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다.

이에 인촌이 명의를 도용당하여 써진 기사이니 이를 근거로 친일행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이를 근거로 들만한 것이 '김승학의 보고서'다. 김승학의 보고서에 '친일기준'에 따르면,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다닌 자'로 김성수는 유억겸과 같은 분류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반론으로, 동아일보를 설립하였고, 언론인으로 유명한 김성수가 명의를 도용당해 신문에 학병권유글이 

자기 이름으로 써지고 있던걸 자기혼자 모르고 있었다는게 말이 되는가라는 반박도 있다.

실제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취소소송 재판에서 재판부는 

"김성수가 전국 일간지에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ㆍ선동하는 글을 여러 편 기고했고 징병제도 실시 감사축하대회에 참석했다"

며 "이를 명의가 도용ㆍ날조됐다거나 오로지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이뤄졌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덧붙여서 "공이 있다고 과오가 사라질 수는 없다. 아름다운 반성은 감동을 주고 화해의 물꼬를 트게 마련이다. 이같은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만이 

역사 앞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길임을 직시해야 한다."


며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어느정도 친일파냐 아니냐의 논란은 일단락이 된셈....이지만 아직도 학계에서는 논쟁이 많다.

여러 행적에 비해서 친일행적이 작은 편이고 또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그를 친일파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

총독부의 창씨개명 요구를 끝내 거부했다는 점에서 신문,회사,학교를 살리기위한 '소극적인 친일'이었다는 평도 있다.

특히 우익 세력에서 정치적으로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이들측에서는 '같은 친일 기고문 떡밥이 있는 여운형은 안 오르고 김성수는 오르냐.'는 

이유로 민족 문제 연구소를 공격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여운형선생님이 친일파 명단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선친일 후항일이라는 기준때문이다. 

일제말기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 확인되어 이전의 친일기고문과 무관하게 친일파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3. 친일파의 프렌드쉴드?


여담이지만 이런 특이한 이력때문에 친일파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등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한민당 창당에 관여하는데, 한민당은 무려 구성인원의 3/4가 친일파로 구성되어 있는 진성 친일지주정당이었다.

친일지주들이 창당한 정당이라 (김성수도 매우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던 부자였다. 현재까지도 있는 경성방직이 그가 만들었던 것.)

자금이 매우 많았는데 이를 이승만이라든지 김구선생님 등 유력 독립운동가들에게 정치자금으로 제공해 친일논란을

잠재우려 하였다. 이때 임정요인들은 화가나서 이 정치자금은 친일행위로 벌어들인 자금이라며 한민당과 갈등을 일으켰다.

그때 가만히 있던 송진우가 "니들만 독립운동했냐?"하자 데꿀멍;; 근데 실제로 한민당은 3/4가 독립운동 혐의가 없다.

이런 식으로 한민당은 표면에 김성수나 송진우, 장덕수등을 내세워 친일논란을 물타기 잠재우려고 하였다. 결국 친일기준이 매우 낮아지게 된다.

(송진우는 김성수와 달리 친일논란도 없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실려있지않은 진퉁 독립운동가였기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4. 각계 인사들의 평가


인맥이 넓고 독립운동, 민주화에 헌신했으며 돈을 수없이 벌었으나 자신의 안위에 쓰지않았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점,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나서지 않고 뒤에서 활동했다는 점때문에 김성수의 평은 대단히 높다.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서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김대중, 전대통령-


"인촌의 특징은 평범의 비범이라고 보며 매사를 평범 속에서 구상하고 이를 겸허하고 성실하게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겸양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뒷자리에 앉아서 남의 공로를 드높여 주는 것이

그의 국량이요 경륜이었습니다. 그는 담박명지의 무욕한 천성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는 부호소리를 듣는 대경영인이면서도 사생활은 일반 서민들의 궁핍에 비견할 만큼 검약 절제 극기를 닦았습니다."

-김수환, 전추기경-


"어떤 사업과 경륜도 애국애족의 정신을 떠나서 한 것도 없고 동지의 뒷받침도 공로를 의도함이 아니요

동지애의 자연 발로였다. 국내외에서 투쟁하던 지사들의 여비를 걱정해 주고 봉투에 감사와 애정을 담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재력만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김병로, 전대법원장-


"그는 마음이 결백하고 언행이 올곧고 활달하여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면서 

앞날을 기약했는데 진실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도다."

-신익회, 전 국회의장-


"인촌 김성수를 친일파라고 무책임하게 매도하는 것을 보고 개탄과 한심함을 느낀다.

인촌은 군자금 모집책이 오면 금고문을 열고 슬쩍 나간다. 은밀하게 지원하는 일이 인촌의 이중적인 삶이었던 것이다.

인촌은 1948년 반민특위때도 거명되지 않았다."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이자 국사편찬위원-


"친일파는 (인촌이 아니라) 이승만이다. 인촌이야말로 평생을 교육과 자선사업에 바친 분인데,

진정한 애국지사를 키운 분이 아닙니까?"

-김두한, 전 국회의원-


(사실 전체적으로 평은 좋은 인물이라 최근의 평가절하는 동아일보의 정치성향 변화에 무관하지 않다는 말도 많다.

한때 동아일보가 민족정론지라는 평을 받으며 반독재투쟁을 할때에는 아무도 김성수를 욕하지 않았다는 것.)



어쨌든 학계에도 매우 어중간한 인물이라 논란이 많다. 어떤 인물인지 판단은 개개인의 몫일 것이다.

출처는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 연구'(이현희), 

http://mirror.enha.kr/wiki/%EA%B9%80%EC%84%B1%EC%88%98%281891%EB%85%84%EC%83%9D%29#s-2.3

인터넷 기사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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