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적으로 안수찬 기자와는 일면이 있습니다. 같은 학과 대학원 과정에서 그와 특정 과목의 한 학기 수업을 같이 들었습니다. 학부 학번으로는 제가 후배이지만 대학원은 제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한 학기 동안 지켜본 안수찬 기자는 왜소하지만 곱상한 외모에 스마트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같은 학과 대학원 선배였고, 장인[아내의 아버지]은 같은 학교 모 학과를 정년 퇴임한 교수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가 저런 시궁창 같은 내면을 지닌 자였음을 전혀 몰랐습니다. 다시 한 번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와 때이른 대선정국을 거치면서 언론, 그중에서도 진보언론의 민낯을 보게 되었습니다. 안수찬 기자가 "덤벼라 문빠들아!"라고 던진 외침은 그 민낯의 가장 저열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빠도 문빠도 아닌 저는 이 외침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덤벼라 개/돼지 같은 대중들아!"라고 말입니다. 제가 딴게에 <권력과 영토>라는 제목[http://www.ddanzi.com/free/176695461]으로 썼던 글에서 저는 한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과 정치의 근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첫째, 권력과 영토는 늘 상대적으로 작동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것. 둘째, 이러한 방식은 사회를 구성하는 촘촘한 권력과 영토의 관계성 속에서 노예들 간의 욕망의 관계성을 구성한다는 것, 그것은 한 노예의 다른 노예에 대한 과시와 지배의 욕망의 관계성을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추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집단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을 자기 자신이 모두 대표/대리/재현/표상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래서 자신의 욕망=대중의 욕망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과 정치의 근본적 특성은 언론 권력에도 그대로 작동합니다. 가령 보수 우파의 정치적 욕망을 대표한다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자신들 만의 영토가 있습니다. 물론 <조중동>으로 묶여도 그 안에서 각자는 자신들만이 영토를 구축합니다. 보수 세력들 뿐만 아니라 진보 세력들에 대해 추구하는 전략도 각자 다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끼리의 권력관계도 묘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반면 진보 세력의 정치적 욕망을 대표한다는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도 자신들 만의 영토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앞서 지적했던 보수 신문들의 특징들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근래에 깨달은 보수 우파 신문과 진보 신문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들이 단지 <보수>와 <진보>라는 각자의 영토로 갈라치기 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보수나 진보를 대표하는 신문들 모두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대중>을 필요로 하지만, 또 그들이 <대중>의 진정한 대표자[대리자/변호자]라고 치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중에 대해 가지는 선민의식, 엘리트주의, 과시주의, 지배욕구는 보수 신문 뿐만 아니라 진보 신문들에게도 공통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대중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mass라는 아주 교활한 표현으로 숨길 뿐입니다.
3.
그러므로 안수찬 기자가 "덤벼라 문빠들아!"라고 던진 [저는 이를 "덤벼라 개/돼지 같은 대중들아!"라고 해석합니다.]외침은 단순히 안수찬 이라는 고유 존재자가 집단으로서의 대중에게 던진 단순한 외침이 아닙니다. 그건 선민의식, 엘리트주의, 과시주의, 지배욕구로 똘똘뭉친 이땅의 모든 형태의 집단적 형태로서의 권력들(언론 권력, 자본 권력, 정치 권력, 문화 권력 등)이 또다른 집단으로서의 대중에게 던지는 정치적 무의식에 기반한 집단적인[=사회적인] 정치적 발화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안수찬 개인의 목소리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차라리 그건 이땅의 모든 언론 권력의 집단적이고 일원적인 정치적 목소리 그 자체입니다. 이쯤되면 문빠, 아니 오히려 문빠에 포함되지 않는 진보적/좌파적 대중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4.
2002년 효순이/미순이 사건, 2004년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2008년 광우병 촛불 사건, 2009년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사건, 2016~7년 박근혜-최순신 국정농단 사건과 대선을 거치면서 대중은 그야말로 스마트한 대중으로 거듭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사건>[철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에 대한 대중의 앎에 대한 의지가 매우 다양한 수준에서 매우 높은 수준으로 진보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의 구성은 특정 전문가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고, 대중 전체에게 확장되었습니다. 이제 대중의 특정 분야에 대한 앎의 수준은 전문가에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천의 영역에서 대중은 이러한 앎을 바탕으로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된 장치는 바로 <스마트 세계>의 구축입니다. 그럼에도 사회의 갖가지 권력들, 그리고 그러한 권력들 안에서 기생하던 세력들은 이러한 세계가 도래하게 된 사실, 그리고 그 사실로 도래한 새로운 대중의 도래 사실을 부정하게 됩니다.그들에게 대중은 아직도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교육을 받아야 하고, 지도를 받아야 하고, 관리를 받아야 하고, 통제를 받아야 하는 어리석은 개, 돼지처럼 여겨질 뿐이죠. 그리고 언론 권력은 이른바 명예욕을 바탕으로 지탱되는데 그런 그들에게 앎과 실천을 겸비한 똑똑해진 대중의 등장은 결코 반갑지 않은 일이죠.
5.
언론 권력은 대중이 결코 똑똑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보수 신문 뿐만 아니라 진보 신문들에게도 공통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에 대한 선민의식, 엘리트주의, 과시주의, 지배욕구를 작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언론 권력이 대중에게 요구하는 바는 우매함도 현명함도 아닙니다. 그들은 대중에게 <적당히 똑똑함>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200만 개의 촛불을 밝힐 시민을 요구하지만 그 시민이 모두 문재인을 뽑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고요?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이 구축하고 있는 영토 내에서 뽑아먹을 수 있는 이익을 대중에게 나누어줘야 하기 때문이죠. 바로 여기에서 "그들은 대중을 필요로 하지만,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역설이 파생됩니다. 제가 볼 때 이러한 역설은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경향신문 등의 진보 신문 세력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중에서도 <한겨레>는 매우 악질적이죠. 그렇기에 반문 세력들을 대변하는 언론 권력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우리는 대중에게 우리의 권력과 영토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조중동 보다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경향신문이 더 악질적인 이유는 그들이 그간 저러한 정치적 목소리를 은밀하게 숨겨왔다가 최근에 들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6.
언론은 또한 특정 사안에 대한 제한적인 비판의 무기를 작동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대중의 자신에 대한 비판도 제한적이기만을 원합니다. 다시 말해 경계를 그어놓고 그 경계를 넘어선 대중의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하죠. 가령 언론과 미디어는 그들의 목표인 특정 사건에 대한 객관적 진실의 추구에 다가가기 위해서 비판이라는 무기를 작동시킵니다. 이때의 무기는 언론이 평상시에도 작동시켜야 할 무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 상황에만 작동되는 무기입니다. 이때의 위기 상황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거의 멸망 상태에 이른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 상황이 아니라 그들의 이권 창출에 제한이 걸릴 만한 위기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위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 바로 비판이라는 무기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경계가 분명하게 그어진 무기일 뿐입니다. 언론 권력은 언론 산업의 경계 내에서만 자신의 비판이라는 무기를 작동시킵니다. 그 경계란 진보와 보수 모두를 아우르는 언론 산업 전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특정한 언론이 구축하고 있는 영토 내의 경계도 가리킵니다. 이런 관점을 통해서 볼 때우리는 "왜 TV조선이 그토록 박근혜-최순실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데에 열을 올렸는가?", "그리고 왜 그들은 안철수를 띄우는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실은 JTBC의 <뉴스룸>에도 해당합니다. 제 아무리 <뉴스룸>을 찬양해도 그들은 삼성공화국이라는, 종편이라는 한계 또는 경계 내에서만 자신들의 비판의 무기를 작동시킵니다. 그것을 벗어나는 비판의 무기는 작동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벗어난 대중들의 날선 비판도 그들은 수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7.
<한겨레>와 <한겨레21>의 안수찬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래의 안수찬 기자의 1년 전 페북은 그들의 경계 또는 한계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비판적인 언론 권력이라도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의 생존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중의 구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한계는 여기까지 입니다. 그들의 잘못에 대한 대중의 비판은 그들의 한계나 경계 내에서는 수용이 불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위해 필요한 피는 대중에게서 빨아먹고, 정작 대중들을 그릇되게 비판하는 그들에 대한 대중의 비판을 개/돼지들의 울음소리로 치부해버리죠.
그들은 한 마디로 말해 <영혼없는 흡혈귀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마도 전쟁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개/돼지들로 치부하는 대중이 참여하는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증명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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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출처 : http://www.ddanzi.com/free/183808128
작정자 : 래이來而 님
출처 | http://www.ddanzi.com/free/183808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