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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줘'에 관한 조금 다른 생각. (스포)
게시물ID : movie_387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ksow12
추천 : 16
조회수 : 1757회
댓글수 : 36개
등록시간 : 2015/01/03 01:37:16
gone girl

 이 영화에서는 이상한 부분이 있다. 그건 사라진 아내 에이미가 잠시 거주하던 여관(?) 같은 곳에서 만난 여자와 그를 따라다니던 여자에게 자신이 돈이 많이 있다는 것을 들키고 그 돈을 빼앗기는 대목이다. 영화에서 이 대목은 상당한 위화감을 준다. 전체적인 스토리에서 에이미는 하나의 완벽하게 조형되어 있는 악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에이미가 폭력을 당하고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채 돈을 뺏기고 계획 전체가 뒤틀리는 이 장면은 굉장히 낯설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어생한 장면은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 일지도 모른다. 그건 자연스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빗 핀쳐가 무리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집어넣은 장면일 테니깐 말이다. 그럼 과연 이 장면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영화를 보다보면 어느새 관객들은 던을 동정하게 된다. 저 나쁜 악녀인 에이미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순진하고 무고한 남편 던, 게다가 마지막 가지 진실도 밝히지 못한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매여 떠날 수 조차 없게된 던. 그런데 던은 그렇게 나이스한 사람이 아니다. 던은 실직 이후에 게을러 졌고, 이기적이 었고, 거짓말을 했고, 바람을 폈다. 던은 에이미와의 결혼 생활을 스스로 고백했던 것처럼 방임했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결혼 생활의 전환을 위하여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게 사실인지 조차 의문이다. 그러니깐 던은 에이미와의 결혼 생활에서 스스로 관계를 무너뜨린 장본인이다. 이에반해 에이미를 보자. 에이미는 던이 쿨한 여자를 원했기에 쿨한 여자가 되었다. 이는 에이미만이 던을 통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던은 몰랐겠지만,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겟지만 에이미는 던과의 관계를 위하여 던의 취향에 맞게 스스로를 통제했다. 몇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렇기에 에이미는 말한다. "당신은 나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길 애썻을 때 그나마 사람다웠어." 에이미는 과연 정말로 그렇게 통제광이었을까?

 에이미가 원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이 했던 관계에 대한 노력 만큼의 동등함 이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 노력만큼 상대방도 그만큼 노력해 주길 바라는 것. 에이미와 던의 관계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운명처럼 이루어 진것 같았지만 그 속에는 에이미의 무던한 노력이 있었다. 던도 그 노력에 맞추어 노력했지만 이내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아기로 관계를 다시 이으려는 던의 시도는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게 보일 정도다. 만일 에이미가 전 남자친구의 말처럼 넥타이 하나 때문에 싸우고 그것 때문에 성범죄자로 만들만큼 통제광 이었다면, 미주리로 에이미가 따라온 것도, 그의 실직을 감내한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과연 에이미는 자신이 사준 넥타이를 안맨것 때문에 전 남자친구와 그렇게 많이 싸웠던 것일까.?
에이미는 던을 떠나면서 말한다. "던은 나의 자존감, 자존심, 희망, 돈을 빼앗아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에이미가 그렇게 사라진 이유였다. 전 남자친구 또 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단지 전 남자친구는 그런 자신의 약한 모습을 던 처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재미있는 건 던이 에이미가 사라지던 날 'The Bar' 에서 마신 술은 버번이며, 전 남자친구에게 에이미가 가지고 간 술 또한 버번이다.

 에이미는 남자를 그저 자신의 소모품으로 이용해 버리는 악녀가 아니다. 에이미는 오히려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휘둘리는 가녀린 주인공의 모습에 더 가깝다. 에이미는 친한 친구가 한명도 없다. 부모와의 관계가 좋은것도 아니다. 형제가 있는것도 아니다. 에이미는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도 못한다. 에이미는 오로지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정립되는 인간이다. 여기서 처음 말했던 폭력의 이유가 드러난다. 혼자가 되자 마자 바로 외부의 폭력에 굴복된다. 에이미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에이미는 남자에게 구원 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너무 여린 존재이다. 에이미라는 인간이 관계에 종속되어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제 에이미가 조금 이해된다. 에이미에게 관계라는 것은 단순히 삶의 한 부분이 아니다. 에이미에게 관계란 삶의 전부이며 자신을 말해주는 존재 이다. 이제 조금 감이 잡힌다. 던은 단순히 바람을 피우고, 게으르고, 무신경 했던게 아니다. 에이미의 말 대로 던은 에이미를 죽이고 잇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건 던의 관계이다. 던은 친한 남자 친구가 없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에게 호의적인 인물들은 모두 다 하나같이 여자이다. 특히 여동생 마고와의 관계는 특별하다. 마고는 쌍둥이 동생이며 태어나기 전 부터 알아온 관계이다. 그녀는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도 던 편이며, 던을 위해 진심으로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이다. 영화의 초반에 나오는 더 바에 들린 던이 마고에게 보드 게임을 가져다 주며, 어릴 적 네가 좋아했던 게임인지, 내가 좋아했던 게임인지 헷갈려 하는 장면은 이러한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극명하게 에이미와 다른 관계이다. 던에게는 노력하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성립되는 관계라는 것이 있다. 영화는 계속해서 이러한 관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던에게 관계는 에이미에게 만큼 절박하지 않은 것이다. 불륜 상대인 어린 여자는 던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린다. 그녀가 오디션을 봤다며 '당신이 자기의 삶을 가지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는 모습은 이 여대생이 얼마나 던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렸는 지 보여준다. 또 한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마고는 싱글로 나온다. 아버지는 바람을 피고 거짓말을 하며 보호소에 있다. 여대생도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없다. 게다가 형사 또 한 이혼을 한 사람으로 나온다. 던의 주위에 있는 여자는 남자가 없다.

 그렇다면 에이미에게 남자라는 건 어떤 존재일까. 앞에서 말했듯이 에이미는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인물이다. 처음 여자와 친구가 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호텔에서의 여자는 결국 에이미를 방해하는 존재가 된다. 그것도 남자를 이용해서. 남자를 설득하고 이용하는 건 에이미의 주특기일 테지만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관계의 커플에게 당해 버린다. 여자는 결코 에이미에게 관계의 정립에 이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으로 존재한다. 그녀가 남자에게 관계를 정립하는 이유는 에이미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잇다. 에이미는 던을 세련되고 성공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확히 말해 에이미는 남자를 통해 스스로를 정립하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을 통해 바뀌는 모습 속에서 자신을 투영한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원더풀 에이미 같은 것이다.
에이미의 부모에게 에이미는 원더풀 에이미의 상징이다. 그녀가 실종 되었을 때 부모의 모습은 마치 원더풀 에이미를 홍보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원더풀 에이미가 에이미의 상징이 아니라 에이미가 원더풀 에이미의 상징인 것을 보여준다. 실존하는 에이미는 원더풀 에이미의 대리다. 적어도 그들의 부모에게는 말이다. 그렇다면 에이미가 남자를 바꾸는 것으로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만드는 모습들은 바뀐 남자들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마치 원더풀 에이미와 에이미의 관계 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에이미는 여자를 필요하지 않는다. 에이미는 바뀐 남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그렇기에 남자들의 몰락은 자신의 몰락과 동일한 말이 된다. 에이미는 정말로 이 관계라는 것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인물로 애초에 설정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에이미의 행동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 하나 더 생긴다. 바로 닉 페트릭 헤리스가 연기한 부자남자 데시 콜린스다.
에이미는 왜 데시 콜린스를 버렸을까?. 그가 자꾸 자신의 말을 안들어서? 앞에서 말했듯이 에이미는 그 정도로 사이코가 아니다. 아마 그러한 이유들로 사람을 죽여야 했다면 이미 던은 결혼하고 며칠만에 주검으로 발견됬을 것이다. 에이미는 데시 콜린스에게 아무것도 발견 하지 못했기에 그를 버린다.  데시 콜린스는 결코 원더풀 에이미가 되지 못한다.
그 전의 남자들과 다르게 데시 콜린스는 너무 잘났다. 그녀가 필요한 걸 다 챙겨주고, 이미 성공한 사람이며, 모든 행동은 그 만큼의 여유가 보인다. 이는 관계의 주도권과는 다른 이야기다. 관계의 주도권은 데시 콜린스의 경우에도 여전히 에이미의 몪이다. 에이미가 데시 콜린스를 버린 이유는 자신이 데시 콜린스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바뀌는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남자를 통해 정립할 수 없기 때문에 데시 콜린스를 버린 것이다.

에이미는 덕에게 돌아간다. 왜 돌아 갔을까? 덕의 인터뷰에 감명 받아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건 에이미가 데시 콜린스를 언제 죽이기로 했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인터뷰를 보기 전날, 별장에 온 바로 다음날 에이미는 이미 cctv의 사각지대를 찾고 있다. 에이미는 이미 데시 콜린스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있다. 그는 프로이트에 대해 토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그녀만큼 뛰어난 남자이기 때문이다. 에이미가 덕에게 돌아 간 것은 그녀가 어떠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지 알게되고 나서가 아닐까? 에이미에게 남자는 자신이 뛰어난 것을 보여주는 상징 즉 원더풀 에이미다. 그런데 이제는 원더풀 에이미가 한명 더 있지 않은가. 그건 바로 미디어에서 비쳐지는 그녀다. 그건 너무나도 완벽한 원더풀 에이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사실 남자가 필요없다. 남자가 자신을 통해 더 나아지지 않아도 된다. 그저 미디어에 비추는 그림자를 만들 수 있게 서 있기만 해도 된다. 에이미가 집에 돌아와 그 전과 다르게 덕과의 관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더 이상 덕은 에이미의 원더풀 에이미가 아니다.

 미디어는 허상을 실제로 만든다. 사람들은 그것에 속는다. 현실은 불안하고, 결혼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런데 왜? 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이 진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빗 핀쳐가 보여주는 현실은 현실을 통해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다. 마치 에이미 처럼 우리는 에이미를 진정한 에이미로 보지 않는다. 사실 허상인 원더풀 에이미가 진정한 에이미이며 그러기 위해선 에이미는 원더풀 에이미보다 불행해도 된다. 그건 마치 원더풀 에이미의 진화 같은 것이다. 만일 미디어로 보여지는 원더풀 에이미가 무너진다면 에이미는 그건 에이미를 죽이는 살인이다. 마치 덕이 자신을 망침으로써 덕을 만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망쳤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에이미가 그렇게 낯설지 않게 보인다. 아니 오히려 친숙해 보인다.


'gone her'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잘 지은 제목이다. 그녀는 사라지고 원더풀한 그녀만이 그림자를 비춘다. 그녀는 어디에도 없다. 원더풀한 그녀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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