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매정하게 말하면, 한겨레의 앞에는 비굴이냐, 고통이냐의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프고 괴롭겠지만 지금의 운명을 긍정하고 고통의 길을 걸었으면 한다. 가령 한겨레가 앞으로 다구리를 면한다고 치자. 그래도 그신문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신문의 문빠 프레임 씌우기를 공정보도의 미담으로 여길 사람은 더욱 없어 보인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주장해서는 안되고, SNS의 개별성을 내세워 구차하게 기자 개인의 일탈로 빠져나가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그럴수록 더욱 초라해질 뿐이다.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만리동 사옥에 윤전기 갖다 놓고 종이신문만 발행하는 신세나, 폐간하고 각자 집에서 사설미디어 운영하는 신세나 오십보백보다.
지금이야말로 그신문의 예전 장기였던 ‘프레임 씌우기’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덤벼라 문빠들’하고 일갈했던 안수찬의 기개를 한번 발휘해 볼 일이다. 그신문이 최근 출간한 책이 마침 <틈만 나면 살고 싶다>가 아니던가. ‘프레임 씌우기’를 말하는 것은 한겨레의 부활을 뜻하는 게 아니다. 독자들이 인정한 대로 그신문의 공정성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하지만 그신문이 폐간하더라도 그신문의 시대가 추구했던 가치와 정의, 우리 사회에 던져진 의미 있는 의제들마저 ‘독자하고 싸우기’의 뻘짓에 휩쓸려 ‘동반 사망’하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 그신문의 ‘마지막 승부수’는 아직도 남아 있다.
(김종구 원문)
조금 매정하게 말하면, 노 전 대통령의 앞에는 비굴이냐, 고통이냐의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프고 괴롭겠지만 지금의 운명을 긍정하고 고통의 길을 걸었으면 한다. 가령 노 전 대통령이 앞으로 기소를 면한다고 치자. 그래도 그의 무죄가 확인됐다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와 박연차씨의 돈거래를 상부상조의 미담으로 여길 사람은 더욱 없어 보인다.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진술할 필요야 없지만, 피의자의 방어권을 내세워 구차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그럴수록 더욱 초라해질 뿐이다.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봉하마을 집 주변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위리안치’되는 신세나, 옥중에 갇히는 생활이나 오십보백보다.
지금이야말로 그의 예전 장기였던 ‘사즉생 생즉사’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고 깨끗이 목을 베라’고 일갈했던 옛 장수들의 기개를 한번 발휘해볼 일이다. 그가 한때 탐독했던 책이 마침 <칼의 노래>가 아니던가. ‘사즉생’을 말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 개인의 부활을 뜻하는 게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이 선언한 대로 그의 정치생명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하지만 그는 죽더라도 그의 시대가 추구했던 가치와 정책, 우리 사회에 던져진 의미 있는 의제들마저 ‘600만달러’의 흙탕물에 휩쓸려 ‘동반 사망’하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 그의 ‘마지막 승부수’는 아직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