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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미도리
게시물ID : panic_938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axa
추천 : 8
조회수 : 87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6/10 02: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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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저는 작가입니다. 주변에서 글 꽤나 쓴다고 하는 그런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작가입니다. 별 볼일 없는 책이나 가끔 내가면서, 이따금 잡지에 글을 투고해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는 그런 평범한 인간입니다. 아마 이곳에서 저를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따로 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혹시나 저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시다면 따로 연락을 주시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퍽이나 술을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소주, 맥주 같은 평범한 술을 비롯하여 친구 녀석들이 하나, 둘 들고 오는 위스키, 보드카 같은 다소 센 술도 사양하지 않습니다. 그런 제가 근래에는 칵테일에 꽂혀 전국 방방곡곡을 칵테일 하나만을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수탉의 꼬리라니,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름 한번 참 잘 짓지 않았습니까? 칵테일을 마실 때면 그 단어의 화려함과 기품이 입 안을 부드럽게 감도는 그런 기분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칵테일은 ‘미도리샤워’ 입니다. 색상이 아름다워서도, 맛이 유별나서도 아닌 이 칵테일의 이름, 그 이름 하나 때문에 저는 이 칵테일을 가장 좋아합니다. 단순히 ‘미도리’라는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말을 적기는 조금 쑥스럽지만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라는 책을 참 좋아합니다.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책 자체의 내용보다는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금 느끼기 위해서 자주 읽고는 하는 책이죠. 그 작가의 다른 책이 대부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책 하나만큼은 정말 제가 사랑하는 책입니다. 여기까지 말했으니 대충 눈치 채셨겠지만 극중에 ‘미도리’라는 이름의 여성을 저는 특히나 좋아합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 그녀의 대사가 적힌 페이지로 하루를 시작하고 잠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듣는 목소리 역시 그녀의 것이니까요. 제 하루의 시작인 아침과 기나 긴 밤 그리고 그 사이를 농밀하게 메워주는 그녀를 저는 사랑합니다.


평소 ‘봄날의 곰’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런 여성을 실제로 만날 수만 있다면 앙증맞은 정장을 입고 갈색의 털이 복슬복슬해 그 품에 푹신하게 안겨 봄날의 들판을 함께 뒹굴고만 싶은, 그런 ‘봄날의 곰’같은 사람이 항상 되고 싶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여성을 여태 만나지 못해 저는 이런 삶을 살고 있나봅니다. 죄송합니다. 사족이 좀 많이 길었습니다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저는 어쨌거나 술을 참 많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약간은 취기가 올라 이유 없이 싱글벙글한 상태니까요.


저는 항상 제가 쓰는 글의 소재를 제 주변에서 찾아보고는 했습니다. 그게 소설이 되었건, 짧은 칼럼이 되었건 뭐든지 제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주제로 글을 쓰고는 했죠. 그날 역시 간소한 저녁을 먹고 따뜻하게 데운 술을 한잔 했습니다. 평소와 같았더라면 밖으로 나가 산책로라도 가볍게 걸었겠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꽤 좋지 않던 날이었으니까요. 아침에는 잠에서 깨어 발치에 지나가던 거미를 실수로 밟아버렸고 점심을 먹고서는 카페로 향하는 길에서 새로 산 옷에 새똥이 떨어졌습니다. 또 물을 마시려다 실수로 잔을 놓쳐 발등이 베이는 뭔가 어떤 일을 해도 잘 풀릴 것 같지 않은 그런 날이었으니까요. 소위 말하는 재수가 없는 날이었죠.


저는 다만 평상시처럼 간소한 저녁 식사 후에 취기가 약간 돌 정도의 술만 마셨고 창틀에 몸을 기대어 도시의 밤과 하늘에 걸친 별의 장막 그리고 아직 채 잠이 들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한손에는 막 타기 시작한 담배를 든 채로 말입니다. 그날 밤에는 밤공기에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밤거리를 지나가는 사람 그리고 또 그들의 안락한 집을 바라보고 있었고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는 밤바람이 불어와 날씨는 유독 쌉쌀하게 느껴졌습니다.


저 멀리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는 한 소녀의 얼굴이 프린트 되어 은은하게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나는 담뱃재를 털기 위해 가져온 빈 맥주병에 별빛과 함께 그 조명을 무심코 담아보려고 했습니다. 훅 하고 내뱉은 날숨과 별빛을 함께 병에 담아 입구를 막고 뒤섞었습니다. 그 소녀의 얼굴에 잔잔한 별빛의 파동이 번지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 후로 저는 무심코 병의 입구에 눈을 가져다대었고 차갑고 투명한 유리 표면을 통하여 무언가 이질적인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아 물론 담뱃재는 병에 털기 전이었습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멀리로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추적거리는 짙은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앞의 풍경은 늘상 보던 그 풍경과 같았지만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비 따위는 내리고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때의 계절은 여름이 아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차가운 유리병에 다시 눈을 가져 갈 때에도 사실과는 다른 그 이질적인 풍경은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위를 살폈습니다. 관음증 환자처럼 보이는 장면의 하나하나 세심한 부분까지 제 눈으로 모두 훑었습니다. 하늘에 흩뿌려진 별과 달은 여전히 따뜻한 빛을 감아 안고 있고 추적이는 여름비는 땅에 입을 맞추며 하나의 달과 또 여럿의 별빛을 바닥에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없었습니다. 그 익숙하면서도 낯선 관경에 대형 전광판 속 갇혀 있던 그녀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텅 비어 하얗게 빛을 내고 있는 여럿의 등만 점멸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태 그 장면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전환된 장면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귀에 들리던 낯선 선율은 도무지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선율은 마치 원래 이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또 부드럽게 제 귓가에 흘러 왔습니다. 기타의 선율을 따라서 저는 눈을 돌렸고 그곳에는 제가 찾아 헤메이던 그녀가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옥상에 걸터앉아 젖은 단발의 머리를 풀어 헤치고선 기타를 끌어안은 채 슬며시 웃고 있던 그녀는 분명 ‘미도리’였습니다. 저는 그녀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그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며, 쓸쓸히 비를 맞으며, 격렬히 타오르는 불구경을 하며 그렇게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빗소리와 함께 실려 오는 그녀의 기타 선율 그리고 그 고운 목소리는 제게 “내게 와서 함께 노래 부르자”하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어느 새 손 끝에 쥔 담배가 다 타들어가 버린 것도 모르고 불씨에 그만 손을 데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가 담겨 있던 맥주병은 놓쳐버리고 말았고 병은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아스팔트 위로 부서져 버린 후였습니다. 외로운 달빛만 그 위로 처량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거리로 뛰어 나갔지만 그곳에는 당연하다는 듯 시린 가을 바람만 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새 사라지고 없었고 이제는 그 어떤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거리는 텅 빈 채로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습니다. 낡은 대형 전광판 속 다시 갇힌 그녀와 눈이 마주쳐 버린 순간. 저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고 아, 그만 울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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