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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이것만은 알아둡시다.
게시물ID : humordata_5861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그네시인
추천 : 12
조회수 : 104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0/03/26 13:11:02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본관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입니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에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습니다. 어려서 안응칠(安膺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세례명은 사도 성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 그래서 안중근 토마스(혹은 도마 안중근)라고도 불립니다. 中 뤼순감옥서 안중근 순국 100주기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생애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안중근의사, 묵념하는 시민 이토 히로부미가 의거 당일인 1909년 10월26일 입고 있었던 피 묻은 흔적이 있는 옷.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사용된 권총과 같은 모델. 벨기에 FN M1900 권총. 중국과 북한에서 생산되었다.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하얼빈 역 전 역인 채가구 역, 창춘 역에서도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의 암살 계획이 있었으나, 각각 철통 같은 수색과 역장의 의심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안중근 이전에도 안양에서 원태우가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 으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총탄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상황을 재현한 모형.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에게 각각 한 발씩 정확하게 명중시켰다 안중근 장군의 권총에 장전된 일곱 발 총알 가운데 발사된 여섯 발은 단 한 방도 헛방이 없었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고종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이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 의사와 김구 선생의 후손 김구와의 인연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김구가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안중근이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국왕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연보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08년: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 1909년: 단지동맹 결성(동지 11명). 1909년 10월 26일: 거사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55분 순국. 이토 히로부미 사살의 영향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1927년부터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엔 저우언라이와 궈모뤄 등이 무한, 장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연출해 반일 투쟁을 고무 격려했다.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은 중국과 북한에서 64식 권총으로 생산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합방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 합방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동경에서 한일 합방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 동양평화론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는데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사상이었다. 평가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즉, 안중근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2005년6월21~24일,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이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안인수, 진해 현감 역임 아버지 : 안태훈(泰勳), 진사 어머니 : 조마리아(趙마리아) 부인 : 김아려(金亞麗) 여동생 :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남동생 : 안정근,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남동생 : 안공근,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큰아들 :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병으로 사망. 작은아들 : 안준생(俊生), 1952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둘째며느리 : 정옥녀 딸: 안현생, 생사불명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조카 : 안우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의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조카 : 안춘생,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손자 : 유일한 손자로, 안웅호(雄浩)는 안준생의 아들이다. 증손자 : 토니 안(안보영) 100년 후 내다본 `동양평화론` 저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시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장부가 세상에 나가니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때를 만드는도다 천하를 응시하매 언제 업을 이룰 것인가? 동풍이 점점 차가워지고 장사의 의가는 뜨거워지누나 분명히 한번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 쥐도적 이토여 어찌 너의 목숨을 살려줄 수 있으리, 여기에 이를 줄 어찌 알았으랴 사세가 그러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루자 만세만세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 대한동포로다. 유묵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불인자 불가이구처약 어질지 못한 자는 궁핍한 곳에서 오래 견디지 못한다 --------------------------------------------------------------------------------- --------------------------------------------------------------------------------- 안응칠 역사>일부 발췌, 안중근 지음 1910년 10월 26일 09 : 00 1910년 10월 25일 밤 11시.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창춘(관성자) 역을 출발하였다. 러시아 측이 이토에게 제공한 특별열차는 최신형 기관차가 끌고 귀빈차에는 응접차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는 밤새 만주 대륙을 힘차게 달렸다. 귀빈차 실내는 스토브의 열기로 훈훈했다. 이토는 브랜디를 머금으며 칠흑의 차창 밖 만주 대륙을 바라보며 이생에서 마지막 밤을 마냥 즐겼다. 1910년 10월 26일, 오전 9시 정각. 이토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 역 플랫폼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대합실에서 차를 마시던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은 일본인 환영객 틈에 싸여 잽싸게 플랫폼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러시아군 의장대 뒤 일본거류민단 환영객 틈에 끼어 섰다. 이윽고 이토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 플랫폼에 멎었다. 열차 도착에 맞춰 플랫폼에 도열한 러시아 군악대가 주악을 연주됐다. 러시아 대장 대신 코코후초프가 이토 수행비서관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의 안내로 객차로 들어가 이토에게 도착 인사를 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각하께서는 더 먼 곳에서 오셨지요." 이토는 코코후초프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답했다. 두 사람은 열차 내 응접 테이블에 앉아 모리가 내놓은 차를 들면서 환담을 나눴다. "이 하얼빈에서 코코후초프 대신과의 회담이 이루어진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도 이토 공작과 동감입니다. 천천히 고견을 듣도록 하고 우선 플랫폼에 정열하고 있는 의장대의 열병을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10년 10월 26일 09 : 25 이토는 코코후초프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린 다음, 러시아 의장대 앞을 지나 환영 나온 각국 영사들이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군악대의 연주 속에 이토와 코코후초프가 나란히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 만철총재, 가와카미 토시히코(川上俊彬) 하얼빈 주재총영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만철이사,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비서관, 무로타(室田) 귀족위원 등이 뒤따랐다. 그때 하얼빈 역 플랫폼 기둥에 달린 시계침은 9시 25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이토는 그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일본거류민단 환영객 앞을 지나 다시 러시아 의장대 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러시아군 의장대 뒤편에 있던 안중근 장군은 이 순간을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로 알고, 가슴에 숨겨뒀던 브라우닝 권총을 뽑아들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1910년 10월 26일 09 : 30 안중근 장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하며 회심의 첫 발을 쏘았다. 그때 안중근과 이토와 거리는 불과 열 발자국이었다. 첫 탄알이 이토의 팔을 뚫고 가슴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총소리가 주악 소리에 뒤섞여 그때까지 경비병들은 영문을 몰랐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안중근 장군은 다시 혼신을 다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탄알은 이토 가슴에 명중했다. 경비병과 환영객들은 그제야 돌발 사태를 알아차리고 겁을 먹은 채, 우왕좌왕 흩어지고 도망쳤다. 총을 맞은 이토는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비틀거렸다. 다시 안중근 장군은 이토의 절체절명 마지막 남은 명을 확실히 끊어주고자 침착하게 가슴을 정조준하여 회심의 세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세 번째 탄알은 이토 복부 깊숙이 명중되었다. 제3탄이 이토를 확실하게 절명시킨 결정의 탄알이었다. 그제야 늙은 여우 이토는 꼬리를 내리고 코코후초프 쪽으로 픽 쓰러졌다. 안중근 장군은 그 자가 혹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만일을 대비하여 그 곁을 수행하던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수행 비서관 모리, 만철 이사 다나카 세 사람에게도 총알을 한 방씩 안겼다. 안중근 장군의 권총에 장전된 일곱 발 총알 가운데 발사된 여섯 발은 단 한 방도 헛방이 없었다. 대한 남아의 대단한 담력과 신묘한 사격술이었다. 의기의 대한 남아가 일본 열도를 향해 던지는 불방망이였다. 그 불방망이로 일본 열도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대한 남아의 장엄한 기백이었다. 대한의 영웅 안 장군은 불타오르는 적개심으로 네 사람을 쓰러뜨린 뒤, 러시아어로 만세 삼창을 목 놓아 불렀다. "코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그런 뒤 안중근 장군은 권총을 거꾸로 잡아 러시아 헌병에게 건네주고 태연자약 의연하게 체포되었다. 그때가 오전 9시 30분이었다. 잠깐 사이에 안중근 장군은 당신이 바란 대로 모든 걸 다 이루었다. 대한의 영웅,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안중근 장군의 쾌거였다. 이 순간 우리나라 백성들은 강화도조약 이래 30여 년 쌓였던 체증을 한순간에 시원히 `뻥` 뚫었다.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대한의군 안중근 장군이 권총 한 자루로 통쾌히 치렀다. 세 방의 총알 세례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곧장 열차에 옮겨졌다. 이토의 수행 의사 고야마(小山)가 맥을 짚고 캠퍼 주사를 놓고 브랜디를 입에 넣어 주었지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소생 불능의 즉사였다. (이때 이토는 즉사하지 않고 의식이 조금 있었는데 모리 비서관을 통해 "범인은 조선인입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바가야로(멍청한 놈)!"이라는 말을 남겼다는 얘기도 있다.) 안중근 장군 죽어서 천년을 살다 대한 남아 안중근 장군이 일본 열도 심장부에 꽂은 비수였다. 만일 안중근 장군의 쾌거가 없었다면 어찌 우리의 민족혼을 말할 수 있으랴. 이토 히로부미 피살 전보에 일본 국민들은 순식간 마른 하늘의 벼락 같은 충격에 빠졌다. 요미우리신문, 동경 일일신문, 대한매일신문 등에서는 호외를 발행하는 등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환호의 찬사를 보내는가 하면, 조정의 친일파들은 몹시 당황했다. 친일내각의 우두머리 이완용은 사저에 일본헌병이 파수를 보게 했고, 친일의 거두 송병준은 일본 순사 셋을 청하여 숙소를 지키게 하는가 하면 한성부민회장 유길준은 이토의 영구를 맞고자 대련으로 향했다. 10월 28일, 순종은 통감부에 행차하여 이토를 애도했으며, 30일에는 이토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밖에 숱한 벼슬아치들이 통감부로 가서 이토의 죽음을 조상했다. 이와는 달리 당시 중국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다음의 글로 조문했다.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냈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이름은 만방에 떨쳤소. 살아서 백년을 사는 이 없는데 그대 죽어서 천년을 사오.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圖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안중근 장군이 순국한 뒤 중국 동북 일대 소학교에서는 중국인이 작사 작곡한 <안중근을 추모하며>라는 노래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진실로 공경할 만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자신도 용감히 죽었다. 마음속으로 비로소 나라의 한을 풀었다. 역사 속에 충의 혼을 우러르지 않을 자가 없었다. 천고에 길이 살아남아 있어라.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저 놈이 필시 이토 노적(老賊)일 것이다" 안중근 장군의 사형이 집행된 교형장 그날 밤(1909년 10월 25일), 나는 김성백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옷을 모조리 벗고 수수한 양복 한 벌을 갈아입은 뒤에 단총(권총)을 지니고 바로 정거장으로 나가니 그때가 오전 7시쯤이었다. 거기(하얼빈 역)에 이르러 보니, 러시아 장관(코코후초프 러시아재정대신)과 군인들이 많이 와서 이토를 영접할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차 파는 집에 앉아서 차를 두서너 잔 마시며 기다렸다. 9시쯤 되어, 이토가 탄 특별기차가 와서 닿았다. 그때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나는 찻집 안에 앉아 그 동정을 엿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어느 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하며 십분 생각하되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즈음, 이윽고 이토가 차에서 내려오자 도열해 있는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북받쳐 일어나고 삼천리 길 업화(業火, 불같이 일어나는 노여움)가 머릿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이 일이 이같이 공평치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뺏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사람은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하고는 다시 더 말할 것 없이 곧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나가 군대가 도열해 있는 뒤에까지 이르러 보니, 러시아 측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맨 앞 가운데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낱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활보하여 오고 있었다. "저 놈이 필시 이토 노적(老賊)일 것이다." 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 쪽을 향해 4발(실제는 3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일행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쏘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고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러시아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역 9월 13일(양력 10월 26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분파소로 붙잡혀 갔다. 안중근 장군의 최후 당당한 모습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정각, 안중근 장군이 간수들의 인도로 교형장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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