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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즈음 그녀가 좋아하는 시인의 새 시집이 출간되었다.
게시물ID : readers_94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야전군스타일
추천 : 6
조회수 : 32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10/22 01:41:10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시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렇게 삭막하고 메마른 세상에 사랑하는 이에게 시를 들려주어 머리를 촉촉히 적셔주고 싶다며 밤에 자기 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전화로 들려주었다.
 
솔직히, 그녀가 읇었던 시 내용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잠자기 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나는 잭 부분이 낡고 터져서 붉은 전선줄마저 히끗 보이는 낡은 해드폰을 휴대폰에 연결해서 그녀가 읇는 시를 듣곤 했다. 낡은 헤드폰이었지만 목소리를 전달 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0월, 그녀는 취업 때문에 너무 바빴다. 매일 하던 통화는 이틀에 한번으로 줄여졌고, 결국엔 연락이 3주동안 끊겼다. 섭섭했지만 나는 그녀가 성공하길 바랬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게 2주에 가깝게 될 때였다. 그날 밤,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검색 사이트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을 검색했다. 시인을 좋아하는 블로거들이 게시판에 올린 시들, 처음 본 것 같지만 왠지 낯익은 느낌의 시들을 보다가 우연히 시인이 다가오는 11월 달에 새 시집을 출간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11월이 되었고, 나는 서점에 갔다. 그녀는 인터넷에서 책 사는 걸 싫어했다. 책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냄새도 맡아보면서 사야된다는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과연 서점에는 책 냄새들이 가득했다. 그녀와 서점데이트 할 때는 긴 머릿결에서 풍겨나오는 샴푸 냄새에만 집중해서 알아차리지 못한 냄새였다.  
 
새 시집을 산지 몇일 후,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항상 만나던 조용한 까페에서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서점에서 산 시집을 들고, 헤드폰을 목에에 걸고 집을 나왔다. 엘레베이터를 타는데 엘레베이터 문에 해드폰의 끝부분이 끼어버렸다. 나는 급히 열림 버튼을 눌렀지만, 그렇잖아도 너덜너덜했던 헤드폰의 잭 부분은 완전히 뜯겨져 나갔다. 그냥 버리기도 뭐해서 늘 하던데로 해드폰을 목에 걸고 까페로 갔다.  
 
평소 때의 데이트와는 다르게 그녀가 먼저 와 있었다. 나는 늘 하던데로 그녀가 좋아하는 느낌의 농담을 인사로 건넸다. 그녀의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녀에게 시집을 꺼내서 시인이 새 시집을 출간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놀랐다는 느낌의 표정의 지으며 고맙다고, 취업에 정신이 팔리느라 새 시집이 출간 된지도 몰랐다고, 자신은 이 시인의 열렬한 팬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없다고, 등등 그녀가 자주 하던 과장된 어투로 어색하게 떠들어댔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침묵했다. 그녀가 커피를 홀짝이는 박자가 바뀌어 있었다. 낯설은 박자. 그녀는 그 낯설은 박자로 커피를 6번 정도 홀짝이고,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붉게 번져가는 그녀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서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시집을 살짝 그녀 쪽으로 건넸다. 그리고 까페를 나왔다. 바람이 차가웠다. 나는 늘 하던대로 목에 건 헤드폰을 썼다. 낡은 헤드폰이었지만 소리를 전달 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낯익은 시를 읇는 목소리가 귓가를 지나 머리속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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