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1987년 김대중의 눈물, 2017년 문재인의 눈물
게시물ID : sisa_9407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울프맨
추천 : 18
조회수 : 124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05/18 19:38:3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150920

 

2017. 05. 18

 

37주년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 포함 참석자 전원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

 

이 노래로 인해 09년부터 시작된 기념식 파행의 역사는 6년만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극우의 음해, 보수의 만행을 받았던 것일까?

이 노래의 박해가 어떻게 비정상화와 민주주의의 퇴행을 상징했을까

 

 

5.18 역사와 함께 이러한 부분을 알아볼 수 있다.

 

1987. 6월 항쟁 이전까지 전두환은 5.18추도를 공식적으로 금기시하였고, 희생자에 대한 유족의 추모도 정권의 감시속에서 조용히 할 수 밖에 없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유가족 및 소수만이 조용히 부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6월 항쟁 후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후부터 광주 망월동 추모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개적으로 부를 수 있었고, 그 분위기를 대표한 게

 

1987. 9.8 추도행사였다.

이 행사는 광주항쟁 이후 광주에 첫 방문한 김대중을 위해 열린 것이었는데

김대중은 71년 이후 16년만에 광주에 방문했다.(3년 동안 해외망명, 납치 살해 미수, 사형선고, 5년 5개월 수감 생활 등등 고난)

 

김대중이 방문하자 수십만의 시민이 모였고, 탄압으로 한적했던 망월동 묘역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김대중의 추도사

-나는 신문을 통해 광주의거를 알았고, 그 배후로 조작된 것을 알았습니다.

-광주시민이 계엄령 해제와 나의 석방을 주장하며 시위했고, 180명이 죽었다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도 보았던 것입니다.

-아! 그 기사를 읽을 당시 나의 충격을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나는 마침내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만이 내가 여러분과 같이 영원히 사는 길이며, 국민과 역사 앞에 바르게 서는 길이라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추도사 후 유가족과 수십만 시민은 일제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묘역에 사람이 많이 모인 것도 처음, 다같이 노래를 부른 것도 처음이었으며

이는 한국 민주화의 진전을 상징했다.

 

이후 노태우 정권때는 광주 청문회를 통해 1980 광주의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

김영삼 정권때는 518 특별법 제정(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졌으나

 

이명박때부터 후진이 시작되었다.

이명박은 집권 2년차인 09년부터 제창을 수용하지 않았고, 2016년까지 이어졌으며

극우의 518 폄훼와 음해에 동조하는 행위로 87년 이후의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든 것.

이것은 전대 정부의 성향이 반민주 반인권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518 추도식이 복원됨으로써 민주주의의 복원과 비정상의 정상화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0년 광주 항쟁이 위대한 이유]

 

광주항쟁 발생원인과 전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 항쟁과 발생원인이 다른데, 광주는 국가폭력이 항쟁발생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점에서 아주 특이한 경우다.

 

전두환의 1980 5.17 비상계엄 확대 이후 18일 오전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반대 시위가 있었으나,

조직되자 않은 수백 학생들의 시위로 이미 공권력에 의해 잦아들고 있는 그런 평범한 시위였다. 

 

그런데 오후 4시부터 시내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상상초월의 잔인한 진압작전을 펼쳤는데, 시위규모 및 양상을 볼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19일에는 더욱 심해져 광주가 피로 물들기 시작한 것.

 

신군부의 목적은 계엄 쿠데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공포통치로 시범케이스를 보이려 한 것인데, 광주 시민은 이에 의연하게 맞섰다.

만약 19일 광주 시민들이 학생들의 희생을 무시하고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전두환의 의도되로 되었을 것이나,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자신들의 피로 민주주의와 역사를 지키기 시작했다.

 

만약 광주의 투쟁이 없었다면 전두환 정권내내 이어진 대규모 민주화 투쟁이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한국의 민주화는 1987보다 더 늦어졌을 수도 있다.

 

광주의 비극을 저지른 전두환은 결국 미국의 압력으로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보면 광주시민들은 자신의 피로 한국의 민주화를 지키고, 김대중의 생명도 구한 것이다.

 

물론 김대중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1987. 9. 8 추도사에서 김대중은 이렇게 말한다.

 

-광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광주를 우회해서는 민족사의 올바른 전개는 불가능 합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평화와 자유 민주의 찬가가 울리는 날, 광주는 구원의 상징으로 영원한 별빛이 되어 민족을 인도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추구한 김대중의 정치정신은 오늘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이어짐.

 

문재인

-목숨이 오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정신은 촛불광장에서 부활했습니다.

-촛불은 518 민주화 정신 위에서 국민주권정신을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을 받드는 정부가 될 것임을 광주 영령 앞에 천명합니다!!!

 

광주 항쟁이 30년전 1987 민주화를 이끌어 냈듯

촛불은 2017 민주화를 이끌어 냈다.

촛불은 광주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 문재인 대통령의 진단은 역사적 흐름으로 볼때 매우 바람직하며 정당하다.

 

1987. 09. 08 김대중의 추도행사

2017. 05. 18 문재인의 추도행사

 

두 행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

 

시민의 궐기로 이루어진 비정상과 적폐의 청산을 대표하는 한국 민주화 성격을 보여주기 때문.

 

임을 위한 행진곡과 유가족과 두 지도자의 눈물은 이것을 상징한다.

 

================================================================================================================================

1.JPG
3.JPG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