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국사 선생님이 생각나네요. 5월이면 그 분이 항상 떠오르곤 했는데 어느새 잊혀지더니 오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키도 작고 정말 비쩍 마른 데다가 말소리도 조곤조곤 조용조용하신 분이었죠. 전라도 사투리 약간 섞인 문씨 성을 가진.
솔직히 그 선생님 수업을 아주 열심히 듣진 않았어요. 너무 조용하고 그저 차근차근 설명만 하셔서 별로 재미는 없었거든요. 근데 왜 기억에 남느냐...
그 분은 5월이 되면 수업을 제대로 안하셨어요. 아니 못하셨겠죠.
미리 진도 왕창 빼놓고 5월 동안은 수업보다 창밖으로 고개 내밀고 담배 필 때가 더 많았던 그 선생님께서 5월이 다 지날 무렵. 그 이유를 말씀하시더군요.
광주에서 그 피비린내는 나는 살육이 저질러지던 그 때 선생님은 조선대학교 학생이셨다더군요. 소식을 듣고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어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거리로 뛰어나간 선생님은 말보다 소문보다 훨씬 참혹한 현실을 보고 앞뒤 가리지 않고 자기도 시민군이 되겠다고 나서셨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말렸다고 하시더군요. 자네같은 학생들이 살아남아서 기억하고 전하고 오래 싸워야할 것 아니냐고요. 27일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도청에서 고등학생들을 내보내던 분들도 저런 말씀을 하섰죠.
그래도 그냥 있을 수 없었던 선생님이 아무거나 시켜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자 결국 할 일을 하나 주시더랍니다.
그 선생님의 원래 성격이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왜 5월엔 수업을 못하시는지부터 그 왜소한고 마른 모습, 조용함을 넘어 뭔가 응어리진 것을 풀지 못해 체념해버린 듯한 힘없는 목소리, 그리고 그때서야 새삼 알았지만 유독 웃음이 없는 얼굴 등 그 분의 삶 전체가 한꺼번에 이해돼 버리는 듯한 순간이었습니다.
세다 지쳐서 잊어버린 몇 구인지도 모르는 그 시신들을 당신 손으로 일일히 수습하면서(광주사진집을 보신 분들이면 아실 겁니다. 그 모습이 말이나 글로는 설명이 안됨을...) 느끼셨을 슬픔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총을 들고 싸우다 거리에서 생을 다한 분들과 다르게 자기는 이렇게 부끄럽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구요. 그 말 끝에 그 때 자신에게 학생은 총 잡을 생각말고 살아서 후세에 길이길이 이 얘고를 전해나 달라고 하던 그 시민군 청년이 그렇개 원망스러울 수가 없더라고 하시면서 다시 담배를 물고 창가로 가신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