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나는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사소한 낙심에 사로잡혀있었고, 제한적인 환경 속에서 인생을 파악하려고 저 나름의 안간힘도 써보았다. 때론 그런 시도 속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보기도 했고 때론 대단히 당혹스런 막연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실상 나는 거의 항상을 막연한 좌절감 속에서 보내야했는데, 아마도 세상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세상과는 달랐다는 점이 아마 나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시간이 흘러 내가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있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을 때 나는 나 자신 스스로가 깊은 외로움에 빠진 것을 느꼈다.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한 고민들을 나보다 앞서 해보았고 이 고민들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답을 내놓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항상 괴롭고 풀리지 않는 정답없는 의문들이 가득차있었다. 나를 채워줄 그 무언가가 있을까 수없이 헤맸지만 그 끝에서 나를 맞이하는건 속았다는 실망감과 허탈감, 배신감들.. 이유도 없는 괴로움과 살아있다는 외로움으로 나의 하루는 날마다 고독과 우울 속에 잠겨있었다. 그 무렵. 나는 외롭고 고민으로 가득찬 나의 복잡한 마음을 그대로 받아줄 그런 사람이 너무나 필요했다. 나는 처음으로 절실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녀는 한밤중 팔베개와도 같았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팔베개를 해주면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시간이 지나 팔이 저려오는 것과 같이.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만남이 시간이 흘러, 그렇게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유는 따로 필요없었다. 나는 그녀를 너무나도 만지고 싶었다. 내 눈이 그 아이의 아름다운 눈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가슴은 쿵쾅거리면서 뛰기 시작했고 이런 감정은 날이 지날수록 더욱 더 커져만가 그 아이를 생각할 때면 등줄기에 뜨거운 기운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가끔씩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의 모든 의구심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순간 순간 그녀에게는 아름다움 그 자체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 아름다움은 그녀 자신보다도 훨씬 더 방대한 어떤 존재였다. 내 마음으로 이해하기에는 훨씬 더 커다란 그 어떤 것이었다.
이제 나의 삶은 그녀라는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끊임없이 신나는 모험으로 가득 찬 세상, 의기양양한 세상,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세상, 그와 동시에 촛불을 향해 구애하는 나방이 돌진하는 그런 멋진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위로 솟구쳐 올랐다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나날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나의 나날들은 나무 꼭대기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가 심연으로 떨어져 내리면서도 중간에 멈출 수 없는 그네와 비슷했다. 나는 매일 아침 그 그네에 매달린 상태로 눈을 떴다. 묘한 흥분으로 온 몸이 전율했다..
하지만 그녀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면서부터 나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불행한 기분과 지나치게 겸손해진 마음으로 나는 그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았다. 무엇이 문제지? 왜 떨리지가 않는거야? 막상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면서, 그녀를 지켜볼 때 느꼈던 감정이 이제는 다시 일지 않았다. 그녀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나는 오늘 아침까지 느꼈던 그 어떠한 감정도 다시 느낄 수 없었고 그럴수록 나의 마음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단지 그녀에게 남은 내 마음은 그녀와 입을 맞추고 살을 맞대고 싶다는 불쾌한 성적 욕망만이 들끓었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고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그녀를 위에서 짓누르고 싶다는 망상이 마구 솟구쳤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사랑과 아름다움에서 저열한 육체적 욕망으로 주저앉아버렸고 나의 외로움을 채워줄 그 무언가는 또다시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내 자신 스스로가 역겨웠고 혐오스러웠다. 견딜 수 없었다. 그녀를 그저 지켜보았을 때도 나의 들끓는 욕망은 항상 생기 넘쳐 안달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부드러운 안개로 감싸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안개가 걷혀지고 내 안에 남은 욕망만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나는 나를 미워했고 나를 짐승으로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짐승이되어 그 아이와 살을 부비고 싶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 속을 지배했다. 그 아이와의 만남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발길에서 나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차있음을 뒤늦게서야 깨닫고 그녀 또한 십자가에 못박아버렸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나의 가슴 속에서 서로 못박혀 죽어버렸다.
이후 나는 그녀에게서 뭔가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그렇지만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어떤 느낌을 갖게되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 무관해보였다. 나는 안도했고 저열한 마음이 만들어낸 속임수로부터 벗어났다는 생각에 기뻐했지만 불안한 황홀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참한 수수께끼였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어둠 속에 작은 두더지처럼 그녀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뿌리치려 할수록 그녀에 대한 사랑만은 더욱 깊어져갔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고 살을 부빌 것을 생각하니 나는 곧 이해할 수 없는 맹목적인 분노에 사로잡혔다. 나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도무지 대처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었다. 나의 마음은 이유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그 아이가 아니라면 어떤 이유도 댈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너무 공허하고 눈물이 났다. 도대체 왜 그 아이를 잊지 못하는 건지 왜 그 아이를 내 성적 욕망의 충족 대상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건지.
이상하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종종 대단히 사소한 것과 연관되어있다. 그 아이가 했던 작은 손짓, 몸짓들. 마주쳤던 눈. 부드러웠던 살갗. 하얗던 피부. 나는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잊지못했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 곁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같았다. 이제 곧 그녀를 떠날 것이라 생각하니 그녀에게 행했던 나의 행동들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지키고자 했던 행동들이 너무나 하찮고 부질없고 어리석은 짓거리로 보였다. 그녀는 아마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슴은 이 새로운 고통을 전부 담아두고 있기에는 너무 유약하고 무거워서 가슴속 고통이 거품처럼 넘쳐 났다. 나는 그 누군가의 어깨 위에 나의 가슴속 고통을 토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홀로 까맣게 삼켜내야만 하는 외로움.. 그와중에도 나는 그녀를 보고싶다 생각했다. 그 아이의 인생에 나는 그저 살짝 부딫힌 작은 점인데. 내게 있어서도 그 아이는 그럴거라고 되뇌였는데. 그냥 각자 잘 지내면 되지 몇번이고 마음을 먹어도 어느 순간 무너지듯 그 아이가 내게 쏟아진다. 그 아이는 나를 좋아했을까? 좋아했다고 한들 뭐가 달라졌을까? 나는 그녀와 관계를 지속하기엔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뻔했고 그녀를 바라볼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싶다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녀를 안고 싶다라는 마음뿐이었다.
이제 나는 그녀를 떠날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 그녀는 자연스럽게 잊혀질 것이다. 처음에는 그립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 아이에 관한 모든 걸 잊게 될 것이다. 이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고 나는 또 다른 어딘가에서 계속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나의 슬펐던 시절은 자비롭게 지나간다. 성숙이야말로 슬픔이 깊숙이 뿌리내린 땅을 원숙하게 해주는 법이다. 그녀에 대한 나의 비애는 격렬했다. 아니, 지금도 격렬해하고있다. 하지만 이런 격렬함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과 함께 스스로 소멸되어 가을 무렵에는 거의 사라지질 것이다. 빗방울이 눈으로 바뀌어 크리스마스가 찾아올 무렵에는 나의 고통도 상당히 완화되어 희미한 우울 이외에 요란한 감정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 아이의 매력을 다시 기억해내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정도가 되겠지.. 그리고 나는 그러한 사실에 당혹스럽고 거북해할 것이다. 이처럼 사랑했건만 내일엔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다니. 이렇게 헤어지고 마음을 접은 다음 나는 어딘가에서 내 마음을 채워줄 또 다른 누군가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