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멸이란, 잊혀지는 것이다.
생물학적 생명은 끝날지라도, 어느것에든 영향을 주고, 기억되고 있다면 그건 존재하는 것이며, 살아 숨쉬는 것이다.
길을 가다 오늘 몇명을 지나쳤는가?
100명? 400명? 그 중에 기억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럼, 그 사람들은 당신에게있어 이미 죽은 사람이며, 아니 살아있던적이 없기에 죽을 수도 없다.
육신이 죽은 자라 하여도, 오랜 시간이 흘러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그려지는 어느 이와의 표정, 장소, 냄새, 목소리, 대화, 음악들이
떠올려지는가?
그럼 그 순간 그 찰나의 그 사람은, 당신의 의식에서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소설 상실의 시대의 어느 구절에 기억-추억에 관한 부분이 있다.
처음에는 오랜시간을 떠 올릴 수 있을만큼, 머릿속으로 묘사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10분, 5분, 2분, 그러다 어느 때부턴 그런 기억이 있었지 정도만이 떠올려지거나, 그러다가 점점 잊혀지게되는.
살아도 산 것이라 말 할 수 없는 이가 있다.
죽어도 죽은 것이라 말 할 수 없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육신을 떠나 산 것과 죽은 것을 나누는 경계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과 기억'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자세 또한 공포나 두려움의 그것이 아닌.
단지 '준비하는' 과정이라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닌 어느 한 중간에 있는 것이기에,
사소한 일상과 마주하는 이들의 관계속에서, 그 속의 나 역시.
은은한 향기로 기억될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