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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58.남월열전(南越列傳)
게시물ID : history_192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3
조회수 : 92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1/09 01:14:18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ㅡㅡ 팟캐스트를 들으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

blog.daum.net/carilla


*남월열전(南越列傳)


또다시 이야기가 잠시 뒤로 돌아간다.

여태까지는 중원의 한족을 위주로 한 이야기와 함께 흉노족이 주된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는사이 중원의 남쪽,대륙의 남해안을 둘러싼 곳에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엇다.

 

도로와 교통이 연결되지 않은곳.

수천년동안 중국의 문화와는 동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통칭하여 백월 이라 하였다.

백월이라 함은 수많은 남쪽 오랑캐 라는 뜻으로 

중국의 남쪽 지역에는 그 이름을 다 셀수 없을정도로 많은 소수 민족이 있었다.

그중에 규모가 큰 부족들은 오랫동안 자기들의 독자적 문화를 이뤄가며 살아왔지만

주나라 시대부터 점차로 중원의 문화와 지배의 손길이 닿아 중국과 교통이 시작 되었다.

전국시대 즈음 해서는 양자강 이남의 초나라가 백월의 종주 노릇을 했으며

오월시대의 월나라도 남만의 종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군현으로 삼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중앙의 힘이 크게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백월의 현령들은 변방의 군벌처럼 행세 했다.

 

한나라 제국이 중국의 평정을 끝냈을때 위타는  옛 양주의 월 을 평정해 속국으로 안정 시키고

한 제국에 공물을 바치게 했다.

 

지금부터 남월의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성패지전 비약규묵(成敗之轉 譬若糾墨)

 

남월왕 위타(尉佗)는 진정 사람이며 성은 조씨 이다.

진(秦)나라때 천하가 병합되자 양주의 남월을 공략해 이를 평정하고

계림군과 남해군과 상군을 설치해 귀양갈 사람들을 그곳으로 옮겨

월나라 사람들과 섞여 살게 한지가 13년이나 되었다.

 

조타는 진나라때 등용되어 남해군의 용천현 현령으로 있었다.

진나라 이세황제 시대에 남해군의 군위 임효가 병들어 죽게되자

그는 용천현 현령 조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진승 등이 난을 일으켰다 하오. 

진나라가 무도하여 천하가 괴로워 하자 항우.유방.진승등이 각지의 백성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다투고 있다고 하오.

이에 중원은 혼란에 빠져 언제 안정될지 알 수 없고

호걸들은 진나라를 배반하여 서로 자립하여 왕을 칭하고 있소.

이곳 남해는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도적들이 이곳까지 쳐들어 올까 나는 걱정하고 있소.

내가 군사를 내어 중원과 통하는 길을 끊어 제후들의 변란에 스스로 대비하려고 했으나

불운하게도 나는 병이 깊어 오래 살수가 없을것 같소.

 

이곳 파우땅은 험준한 산을 등지고 남해의 바다로 막혀 있으며

동서로 수천 리나 뻗쳐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중국 사람들도 많이 살며 서로 돕고 있어

한 주의 중심지로 나라를 세울 수 있소.

그런데 군내의 고관 중에 함께 의논할만한 사람이 그대밖에 없기에 공을 불러 이 말을 하게 되었소."

 

임효는 위조된 조서를 만들어 조타에게 주었다.

그래서 조타는 졸지에 남해군의 군위가 되었다.

 

임효가 죽자 조타는 즉시 격문을 횡포.양산.황계 등지의 각 관소로 돌렸다.

 

ㅡ중원의 도둑들이 침입하려 하니 서둘러 도로를 차단하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지키라.ㅡ

 

그런 후 조타는 서서히 법령을 적용하여 진나라가 파견한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자기 사람을 써서 각군의 군수로 임명 하였다.

 

진나라가 마침내 멸망하자 조타는 즉시 계림군과 상군을 병합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남월의 무왕이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조가 천하를 통일 했을 즈음에는 중국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래서 조타를 토벌할 힘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고조11년에 육가를 보내어 아예 조타를 남월왕으로 삼고

할부를 갈라주어 남쪽 변경에서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때부터 남월은 장사 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태후의 시절에 한나라는 국경 관소에서 남월과 철기무역을 갑자기 금지 시켰다.

조타는 크게 반발 하였다.

"고조께서 나를 왕으로 세워 사신과 물자를 통하게 하시었다.

그러나 이제 고후는 중상하는 신하들의 말만 믿고

우리를 오랑캐 취급하는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

교역을 끊은것은 틀림없이 장사왕 오예의 간계일것이다.

장사왕은 중국의 힘을 빌어 우리 남월을 멸망시키고

남월을 자기의 나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조타는 스스로 자립하여 존호를 세워 남월의 무제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장사 변경의 성읍을 공격해 몇개의 성을 격파하고 돌아갔다.

 

고후는 장군 융려후 주조를 보내 남월을 치게 했으나

때마침 우기를 만나 덥고 습한 기후에 전염병이 돌게되어 양산령을 넘지 못했다.

한해쯤 후에 고후가 죽자 한나라는 그제서야 군사를 철수했다.

 

조타는 이런 틈을 타서 군대를 보내 변경을 위협하는 한편

민월.서구.낙 등에 재물을 풀어 회유하여 그들을 모조리 복속 시켰다.

그리하여 남월의 영토는 동서로 만여리나 되었다.

 

조타는 천자를 본받아 황색 비단으로 장식한 수레를 타고

좌독 이라는 기를 수레왼쪽에 세우고 자신의 명령을 제 라 하면서

완전히 중국과 같이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효문제 원년.

천하가 드디어 안정이 되었다.

효문제는 제후들과 사방 오랑캐들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이 대 땅에서 들어와 즉위한 사실을 알리고 무력을 일삼지 않을것임을 천하에 알렸다.

 

특히 조타의 부모 무덤이 있는 진정에다가 묘지기의 영지를 설정해 주어

해마다 제사를 지낼수 있도록 배려했다.

뿐만 아니라 조타의 종형제들으르 불러들여 좋은 선물을 하사하고

높은 벼슬에 올리는등 조타를 총애한다는 뜻을 밝혔다.

 

황제는 승상 진평에게 조서를 내려 남월로 사신갈 인물을 천거케 했다.

"호치현의 육가가 좋겠습니다.

그는 선제때에도 이미 남월에 다녀온 일이 있으니

그쪽 사정에 밝을것입니다."

 

황제가 육가를 불러 태중대부로 임명한 다음 남월에 사자로 보내

위타가 스스로 황제가 된 일과 그 후로는 한 사람의 사절도 보내지 않은 행위를 꾸짖도록 했다.

 

그런데 육가가 남월에 도착하자 조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이의 두목인 늙은 신하 위타는 황제폐하께 아뢰옵니다.

옛날 고후께서 남월을 차별하신 일은 장사왕의 참소 때문이라고 의심했었습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소문에 신 조타의 종족들을 모두 주살하고 선조들의 분묘를 파헤쳤다고 해서

이에 자포자기하여 장사국의 변경을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곳 남방은 지대가 낮고 습한 지역으로 만이 사이에 있어

우습게도 동월과 민월에서는 백성 천여명을 가지고도 왕이라고 칭하고

서쪽의 구.락 처럼 벌거벗고 사는 나라도  역시 왕호를 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즉 늙은 제가 황제라 칭한 것은 스스로 즐겨본 것 뿐인데

어찌 감히 이 일을 천자에게 전하여 알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남월왕 조타는 육가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앞으로는 영원히 한나라의 번병지신이 되어 공물을 바칠것을 약속했다.

 

그런 후에 조타는 곧바로 나라안에 포고령을 내렸다.

ㅡ내가 듣건대 두 영웅은 함께 설수 없고 두 현인역시 한 세상에 태어날수 없다고 하였다.

고로 한나라의 황제만이 현명한 천자인것이다.

이제까지 사용하던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황옥과 좌독은 모두 페지한다.ㅡ

 

육가가 귀국하여 경과를 보고하자 효문제는 몹시 기뻐 하였다.

그로부터 조타는 봄 가을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으며

효경제 때에는 스스로 신 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남월 안에서는 예전처럼 몰래 황제의 칭호를 쓰기도 했지만

천자에게 사신을 보낼때는 왕이라 호칭했다.

 

한나라에서는 조타를 제후로 대우했다.

조타는 건원4년에 죽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조타의 손자 조호가 남월의 왕이 되었다.

남월이 안정되지 않은틈을 타서 민월의 왕 영 이 남월의 변경으로 쳐들어 왔다.

이에 조호가 한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호소했다.

 

ㅡ남월과 민월 양국은 모두가 한실의 번병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맘대로 병사를 동원해 공격할수 없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월에서 군사를 동원해 저희 남월을 침입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감히 제 맘대로 군사를 일으킬수 없어 천자의 조칙만을 기다릴 뿐입니다.ㅡ

 

천자는 남월이 의리를 지켜 신하로서 직분을 다하는것으로 여겨

남월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래서 왕회와 한안국. 두 장군을 보내어 민월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가 국경의 고개를 넘기도 전에 민월왕의 아우 여선이 민월왕 영 을 죽이고 투항했다.

이에 한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황제는 파병의 뜻을 알리기 위해 장조를 남월로 파견했다.

조호가 장조를 맞이하여 말했다.

"천자께서 소신을 위해 군사를 내어 민월을 토벌해 주셨으니

그 은혜는 죽어도 보답할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월왕 조호는 태자 영제를 입조하도록 장조에게 딸려 보내며 말했다.

"우리 남월은 외적의 침입을 당해 당장은 떠날 형편이 못되니

사자께서는 먼저 출발해 주십시오.

저도 밤낮으로 서둘러 여장을 챙겨 천자를 뵙도록 하겠소."

 

장조가 떠난 후 남월의 신하들이 조호에게 간했다.

"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민월을 멸망시킨것은 우리에게도 위태로운 일입니다.

선왕께서 이르시되

ㅡ천자를 섬기는데는 예를 잃지 않기만 하면 된다ㅡ하시었고

또한

ㅡ달콤한 말에 속아 입조하면 위험하다ㅡ 하셨으니

일단 입조 하시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남월 역시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호는 결국 병을 핑계대고 입조하지 않았다.

그후 10여년이 지나 조호는 병들어 죽었다.

시호를 문왕 이라 하였다.

 

태자 영제가 천자에게 청원하여 귀국했다.

영제가 왕이되자 그는 선왕인 무제가 사용하던 황제의 옥새를 감추어 버리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조영제가 황실에 입조하고 있을때 한단의 규씨 의 딸을 얻어 아들 조흥을 낳았다.

영제는 즉위하자마자 황제에게 상서했다.

ㅡ규씨의 딸을 왕후로 삼고 아들 조흥을 후사로 삼겠습니다.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나라 조정에서는 자주 남월로 사신을 보내 조영제를 입조하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영제는 마음대로 살생하면서 제멋대로 왕노릇을 하며 지내는것이 즐거웠으므로

입조하지 않았다.

 

또한 입조하면 일반 제후의 취급을 받는것이 싫어서

병이라 핑계하고 끝내 입조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아들 조차공을 입조시켜 숙위케 하여 한실의 위협을 모면했다.

조영제 역시 죽었다.

시호를 명왕 이라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태자 조흥이 즉위하고 그의 모친 규씨가 태후가 되었다.

태후는 조영제의 부인이 되기전에 패릉사람 안국소계 라는자와 사통하던 사이였다.

 

원정4년.

한나라에서는 조영제가 죽자 안국소계를 사신으로 남월에 보내어

태후와 왕에게 입조하라고 회유했다.

안국소계와 함께온 변설가 종군이 조흥을 달래고

역시 함께온 용사 위신은 곁에서 협박하는 꼴이었으며

위위 노박덕은 계양까지 군사를 끌고와 사신을 기다리는척 하며 왕을 위협했다.

 

태후는 원래 중국 여자였고 옛날에 안국소계와 사통하던 사이였는데

안국소계가 다시 남월로 오자 태후와의 사통은 또 시작 되었다.

남월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연히 태후에게 반감을 가졌다.

태후는 자기의 음행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 졌고

그로 인하여 더욱 한나라의 위세에 의지하려 했다.

 

그래서 태후는 어린 남월왕을 강권하여 한나라에 복속하게 하고

3년마다 입조하여 다른 제후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타일렀다.

 

결국 남월왕 조흥은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입조하겠다는 약속을 함과 동시에

국경의 관문을 철폐 해 줄것을 청원 했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고 남월의 승상 여가 에게 은으로 만든 인장을 내렸으며

내사.중위.태부 에게도 각각 인을 내려 주고

나머지 관직은 남월왕이 직접 임명할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 남월의 관습인 이마에 먹물들이기.코베기 등의 형벌을 없애고 한나라의 법을 적용하도록 했으며

기타의 제도는 중국의 제후들에 준하도록 했다.

한나라에서는 사자들을 남월에 머물게 하여 그들을 진무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왕과 태후는 많은 예물을 가지고 조정으로 들어갈 행장을 꾸렸다.

 

그때 남월의 재상 여가는 나이가 많았다.

3대의 왕을 재상으로 섬기면서 그의 일족으로 고관에 오른자가 70여 명이나 되었다.

아들들은 모두 왕녀에게 장가갔으며

딸들은 모두 왕자나 왕의 형제나 왕족에게 시집갔다.

또 창오군의 진왕 과도 인척관계를 맺고있어 국내에서 여가의 권위는 매우 무거웠다.

남월 사람들은 그를 신임했고

그의 눈과 귀가되어 활동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민심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는 왕보다 나았다.

 

왕이 천자에게 상서 할때마나 여가는 한나라와 거리를 두라고 자주 충고했지만

왕은 결코 여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일이 계속되자 속으로 불안을 느낀 여가는 배반할 마음을 품었다.

여가는 병을 칭하고 한나라의 사신을 만나지 않았다.

 

사자들은 그런 여가를 요주의 인물로 지목했지만 제반 정세가 아직 그를 죽일정도는 아니었다.

 

왕과 태후는 여가가 변고를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여 선수를 쳐서 그를 주살하기로 했다.

주연을 베풀고 한나라 사신들의 권위를 빌려 여가를 죽일 작정이었다.

 

궁중에 큰 잔치가 벌어졌다.

사자들은 동향하여 앉고 태후는 남향 하여 앉았으며

왕은 북향하고 재상 여가와 대신들은 모두 서향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장군인 여가의 동생은 병사를 이끌고 왕궁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주연이 진행되자 태후가 여가에게 짐짓 물었다.

"남월이 한에 복속하는것은 나라의 이익이오.

그런데 불리하다고 말하는 승상의 의도는 무엇이오?"

 

그것은 한나라의 사자가 여가에게 질책을 하도록 유도하는것이었다.

그러나 여가를 따르는 신하의 무리가 숫적으로 많았고

또 밖에는 여가의 아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으므로

사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사자들은 서로 미루며 감히 행동하는자가 없었다.

 

여가 역시 태후의 의도를 뻔히 읽고 있었다.

사신을 이용해 자기를 죽이려는 태후의 음모를 눈치챈 여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빠져나왔다.

 

태후가 대로하여 창을 들고 쫓아가 여가의 등을 찌르려 했으나 왕이 나서서 제지했다.

"여가의 아우가 밖에 군사를 대기시켜 놓고 있습니다.

기회가 좋지 않으니 참으십시오."

 

연회석을 빠져나온 여가는 아우의 군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여가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여러 대신들을 불러들여 모반을 꾀했다.

 

그런데 사실 왕은 여가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한 왕의 심기를 파악한 여가는 모반을 보류한채 몇달의 시간을 흘려 보냈다.

 

태후는 자신의 음행때문에 백성들이 반감을 품고 있어 자

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힘만으로는 여가를 해 치울 방법이 없어서 역시 세월만 보냈다.

 

이러한 사실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여가가 황제와 왕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으며

왕과 태후는 세력이 약해 여가에게 맞서지 못하고 있고

한나라의 사자들도 두려워서 결단하는자가 없다는 내용도 모두 듣고 있었다.

 

황제는 남월왕과 태후가 이미 황실에 복종하고 있으며

여가가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그것은 남월의 일일뿐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어느정도 겁을 줄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한 황제는

장삼에게 2000의 군사를 주어 남월로 사신 보내려 했다.

그러자 장삼이 말했다.

"친선 우호사절이라면 두사람만 가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토벌하러 가는것이라면 2천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장삼의 말을 들은 황제는 파병을 중지하려 하였다.

그때 겹 땅의 장사 출신으로 한때 제북의 승상이었던 한천추가 분연히 일어나 소리쳤다.

"그까짓 하찮은 남월하나를 가지고 무얼 그리 염려만 하고 계십니까?

더구나 왕과 태후가 내응하고 있으니 반대하는것은 단지 여가 하나 뿐입니다.

제게 용사 2백명만 주시면 기필코 여가의 목을 베어 바치겠나이다."

 

한천추의 뜻을 가상하게 여긴 황제는 용사 2천을 내주고 왕태후의 동생 규락과 함께 가도록 했다.

 

한천추가 남월의 국경에 도달하자 여가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고 나라안에 격문을 돌렸다.

 

ㅡ왕은 어리고 어리석으며 태후는 중국의 여자로서 사신과 간통한 사이 이다.

남월을 통째로 한나라에 바쳐 황제에게 아첨하고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한에 바쳐 모두 노예로 삼아 자신들만 영화를 누리려 하고 있다.

태후는 스스로 한때의 화를 모면하려할뿐 남월왕 조씨의 사직은 돌볼 생각이 없으니

우리는 태후를 용서할수 없다.ㅡ

 

여가는 아우와 함께 즉시 군사를 일으켜 왕궁을 공격하여

왕과 왕태후 및 한나라 사신들까지 모두 죽여 버렸다.

그후 창오군의 진왕과 여러 군현에 이 소식을 알리고

명왕의 다른 아들 술양후 건덕 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편 한천추의 군대는 남월에 들어와 몇몇 작은 고을을 점령 했다.

남월군은 일부러 한천추에게 길을 열어주고 식량을 보급할수 있게 해주며

점차 남월 깊숙히 유인했다.

 

한천추의 병사들이 파우의 40리 못미친 지점에 이르렀을때

드디어 남월군은 이들을 기습하여 전멸 시켜 버렸다.

 

여가는 사람을 시켜 한나라 사자의 부절을 함에 넣어 봉인하고 국경 요새에 놓아두고

사죄하는척 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사들을 배치해 국경 요해지를 지키게 했다.

 

황제는 자신의 계획이 무모했음을 깨닫고

한천추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선봉에 서서 진격한것을 인정하여

한천추의 아들 한연년을 성안후에 봉했다.

또한 함께 전사한 규락은 그의 누이 왕태후가 솔선해서 한나라에 복속했던 공을 인정하여

규락의 아들 규광덕을 용항후로 봉했다.

 

황제는 사면령을 내리고 다시 조칙을 내려 선언했다.

ㅡ천자의 위엄이 쇠약해 져서 제후가 서로 힘을 겨룰때 이를 꾸짖지 못하고 있다.

금 여가와 건덕 등이 모반하여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라 칭하면서도 태연자약하고 있다.

이러한때 신하된자로서 난적을 치지 않는것을 춘추는 비난하고 있다.

그러하니 이제 영을 내리니 죄수들과 강회 이남의 수군 10만에게 출동을 명령하여

남월을 토벌하도록 하라.ㅡ

 

원정5년 가을.

위위 노박덕은 복파장군이 되어 계양에서 출격하여 회수를 따라 내려가고,

주작도위 양복은 누선장군이 되어 예장에서 출격하여 횡포로 내려가고,

본래 월에서 귀순한 두명의 월후는 과선장군과 하려장군이 되어

영릉에서 출격하고 창오로 진격했다.

 

또 월에서 귀복한 치의후는 파.촉의 죄수들을 이끌고

야량의 군사를 동원하여 장가강을 내려와 모두 파우에서 합류했다.

 

원정6년.

누선장군 양복이 정예병을 이끌고 먼저 심협을 함락 시키고

석문을 깨뜨린뒤 남월의 선박과 양곡을 획득했다.

다시 전진하여 남월의 예봉을 꺾고 수만명의 군사를 거느린채 복파장군 노박덕을 기다렸다.

 

그런데 복파장군 노박덕은 죄수를 인솔한데다가

길은 멀고 험해서 합류기일에 늦은탓에 많은 군사가 도망쳐 버려

누선장군과 합류 했을때는 겨우 1천 밖에 남지 않았다.

 

드디어 양군이 합세하여 전진했는데

누선장군이 앞장서 파우에 도착 했다.

이때 건덕과 여가 등은 파우에서 성을 지키고 있었다.

누선장군은 스스로 편리한 지대를 골라 동남쪽에 포진하고

복파장군은 서북쪽에 포진했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누선장군이 화공을 행하여 파우성을 불태웠다.

평소에 복파장군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남월 사람들은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그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복파장군이 영채를 세우고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투항자들에게는 한나라가 임명하는 관직의 인장을 주고

다시 그들을 성안으로 보내 다른 사람들을 항복시켜 데려오게 했다.

 

 

누선장군은 있는 힘을 다하여 적군을 화공으로 공격하여 그들을 복파장군의 진영으로 몰아부쳤다.

새벽 무렵 성안의 적병들은 모두 복파장군에게 항복했다.

여가와 건덕은 한밤중에 이미 그의 부하 수백 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서쪽으로 달아났다.

복파장군이 투항한 남월의 귀족들을 통해 여가가 달아난 곳을 알고

부하장수들을 보내 그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그 결과 교위 사마소홍 은 건덕을 사로잡아 해상후에 봉해졌고

 

남월의 낭관 도계 는 여가를 붙잡아 임채후 에 봉해졌다.

 

창오왕 조광은 남월왕과 같은 성이었다.

그는 한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남월의 게양현령 정 과 함께 스스로 한나라에 항복했다.

 

 

또 남월의 계림군 군감 거옹 은 구.낙 두 나라까지 타일러 한에 귀속하게 했다.

그래서 그들 모두 후에 봉해졌다.

 

과선장군과 하려장군및 치의후가 출동시킨 야량의 군사들이 아직 당도하기도 전에

남월은 이미 평정 되었다.

 

한나라는 남월땅을 아홉개의 군으로 편성했다.

복파장군은 증봉 되었고 누선장군은 견고한 적의 진지를 함락시킨 공으로 장량후에 봉해졌다.

 

남월은 위타가 처음으로 왕이 된지 5대.93년 만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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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위타가 남월 왕이 된것은 말할것도 없이 임효의 덕분이다.

한나라가 처음에 천하를 평정할때 조타는 때를 잘 만나 제후의 대열에 끼일수 있었다.

 

융려후의 군사가 습기와 전염병으로 남하하지 못함으로써 조타는 더욱 교만해 졌다.

민월이 공격하자 남월은 동요했으나 한나라 군사가 국경에 임박하니 영제가 입조 하였다.

그러나 그 후 나라가 망할 조짐은 규씨의 딸에게서 싹텄다.

여가의 작은 충성이 조타의 후손을 단절 시켰다.

 

누선장군은 욕심을 부려 태만했고 그래서 실패했다.

복파장군은 곤궁할수록 더욱 지혜롭게 행동하여 화를 복으로 바꾸었다.

 

성공과 실패가 뒤바뀌는것은 비유해 말하자면 마치 꼬아놓은 새끼와 같아서

항상 번갈아가며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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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남월열전의 전문을 모두 알아 보았다.

 

미개한 오랑캐의 땅에서 중원과 교류하고 국가로서의 면모를 갗춘것은 위타의 힘이 컸다.

그 후손들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크게 한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왕으로 행세하며 지냈다.

그러나 영제때에 이르러 중국의 규씨를 부인으로 데려온뒤 망국의 씨앗이 잉태 되었으니

이 또한 남월의 운명인가 싶다.

 

한 여인의 음심 때문에 백성들의 민심이 이반되고

그로 인하여 무리한 세력다툼이 벌어지며 왕실과 대신간의 쟁투가 생겼으니

이쯤이면 나라꼴이 어찌될지는 아니보아도 알수 있을것이다.

 

한천추의 적은 병력이 국경을 넘었을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진격했으나

한번의 기습으로 2천 병력이 전멸 했으니

이것은 병법을 모르는 무지한 자의 소행임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자를 믿고 남월정벌을 맏긴 한나라의 황제또한 매우 어리석은자라 하지 않을수 없다.

 

자신의 용기만 믿고 적진 깊숙히 뛰어들어 2천의 무고한 병사들을 몰살하게 만든자가

용감하다 하여 후에 봉해진것은

다만 황제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펼친 기만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소제목으로 쓰인 사마천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이 당시의 흥망성쇠라 하는것이 어쩌면 거의 운수에 달렸던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필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만 퍼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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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을미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독자제현 모두 건강하고 소망하는 바를 이루시기를 기원하며

아울러 필자도 사기열전을 연재하는데 더욱 매진하여

좋은 글과 방송으로 여러분께 보답하겠다는 다짐으로

새해인사를 대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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