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蔡秉德 ]
채병덕1914-1950. 군인.
유형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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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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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914년 ~ 1950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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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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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평안남도 평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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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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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관직(경력) | 국방부참모총장,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장,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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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채병덕 [蔡秉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국군의 참패 원인
1) 채병덕 총장의 매국 행위
① 6.25 15일 전인 6월10일 육군의 중화기 및 차량 절반 정도를 수리하라고 부평으로 후송 명령을 내려 6월25일 인민군 남침 시 육군의 발을 묶어놓아 초전 작전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② 6.25 15일 전인 6월10일 연대 급 부대 이동과 전방 3개 사단장의 인사이동과, 육군본부 작전국장, 작전차장, 작전과장을 모두 교체하여 초전 작전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③ 인민군 남침 하루 전인 6월24일 12시를 기해 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을 휴가와 외출을 보내게 하여 1/3이상이 병력이 부대에서 빠져나가 6월 25일 인민군이 남침 시 병력이 부족하여 혼성부대로 편성하여 육군 전체에 전투력을 무력화되게 하였다. 채병덕 참모총장이 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 휴가와 외출을 보내게 한 이유는, 장병들이 오래도록 외출을 못해 사기가 떨어졌다는 것이고, 외출 시 건빵을 가지고 가는데 경계령으로 장병들의 외출이 없어 건빵이 남아돌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④ 인민군 남침 하루 전 6월24일 밤 10시까지 육군회관 개관파티에 육군본부의 국장, 과장, 실장, 전방사단장 등 50여명이 참석하여 술을 마셨고, 어떤 장교는 새벽2시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지 않아 6월 25일 인민군이 남침하였을 때 군 수뇌부의 소집이 안 되어 적절한 대응을 못하였다. 새벽 4시 인민군이 남침하였으나 육본에서는 인민군 남침을 6시간 30분만인 9시 30분에 확인하였다. 그 시간에도 수뇌부 몇 사람의 연락이 안 되어 회의를 하지 못하고 채병덕 총장과 김백일 참모부장이 즉흥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⑤ 서울의 방어사단인 수도사단과 의정부 7사단에 탄약이 전혀 없어 6월 26일 국군 2사단과 수도사단이 의정부에서 탄약이 없어 참패함으로 26일 하루에 3개 사단이 붕괴되어 국군이 비참하게 참패하게 하였다.
⑥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 채병덕 총장은 군 차량은 한 대도 한강교를 건너지 못하게 하여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국군 1사단은 문산에서, 주력부대는 미아리에서 싸우고 있었고, 미군의 엄청난 보급품과 국군의 군수품이 창고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채병덕 총장은 한강을 건너며 이러한 군수품과 보급품, 싸우고 있는 국군에 후퇴명령도 내리지 않고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하여 6월28일 새벽 2시30분 한강교를 폭파하였다. 6월 28일까지 국군 6개 사단이 붕괴되었고, 군수품과 보급품은 고스란히 인민군에 넘어갔다. 국군의 거의 반수인 44,000여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사실상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였다.
2) 참모총장 채병덕 부관은 남로당 간첩이었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부관 라엄광 중위는 육군 병적에도 없는 남로당 간첩으로 이 자에 의하여 채병덕 참모총장은 공작을 당하였고, 라엄광은 6월28일 행방불명되었다
사족
어쩌면 한강다리 폭파도 채병덕이 간첩인 라엄광의 계락에 속아 넘아간 것일수 있다. 국군의 주력과 피난민이 한강다리를 통해 후퇴할수 있는 시간이
다소 있었음에도 미리 앞서서 폭파시킨건 정부와 국군의 주력이 퇴각하는 것을 막아 한강이북에서 전쟁을 종결지으려던 남로당 간첩 라엄광의 계락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