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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긍정과 절대 부정, 그 사이의 깨달음
게시물ID : phil_94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정당한사유
추천 : 3
조회수 : 51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7/28 11:18:29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인류의 기원에 대한 물음. 원초적 본능의 연원..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는가. 저 끝없는 깊이의 물을 응시하면서 나의 삶을 관조하고 무지개 저편의 이상향을 그리면서 나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인간다움의 극치가 아닐까!

인생이란 무엇이고 세상은 또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세상에 어떠한 물음도 갖지 못한 채 내던져진 것일까? 나의 삶의 방향, 대답, 가치, 신념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끝없는 삶의 갈등 속에서 나 자신에게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신뢰하기 위해 이 세상 곳곳에다 나의 뿌리를 내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낯선 사람이 되어만간다. 우리는 왜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위해서 살고 무엇을 위해서 죽을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이유없이 물음없이 그저 내던져진 채로 긍정과 부정의 징검다리에서 때론 웃고 때론 울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겠거니. 생과 사가 항상 지그재로 왔다 갔다 하고 그 자태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슬픔을 딛고 웃음을 찾아가는, 절대 긍정으로의 여행을 우리의 생애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미와 추, 즐거움과 고통, 행복과 불행이 서로 다르지 않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완전한 진리라든가 완전한 허위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우리는 이런 알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상대적 부정을 통해 결국은 절대 긍정으로 나아간다는 신념 아래 희망을 찾는 것이. 그것이 인생이라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의 삶은 어떠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심지어는 낙천적으로 절대 긍정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인류의 문화와 과학이 진보할 수록 우리는 이런 절대 긍정의 방향에서 한층 더 진보해 간다는 것,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낙관적 생애는 죽음이란 고난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진정한 낙관이 아니다. 인생에서 상대적 긍정을 기대하지만 결국은 절대 부정으로밖에 치달을 수 없는 우리의 삶. 세상을 알아갈수록 세상의 객관적 부정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잃어버리는 수많은 사람들.. 우리 모두는 진실로 객관화된 부정 앞에서 자신이 걸어왔던 모든 길을 역행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긍정이 결국은 깨질 수밖에 없는 절대 부정 앞에서. 죽음 앞에서 우리는 깊은 허무감을 직면하게된다. 이것은 상대적 부정의 주관적 절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상대적 부정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진정한 절대 부정으로 심화되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절대 부정적 인간은 단순한 주관적 절대화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생명이라면, 모두가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부정의 늪에 빠져버린다. 객관적 절대 부정의 엄존 앞에서.. 죽음에 직면함으로 말미암아 안이한 희망적 신념에 의한 절대 긍정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져내린다.

생의 엄연한 절대 부정이고 생의 종극으로 불리우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잠. 죽음. 죽음이 우리에게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것은 반드시 다가오는 것이기에 우리의 생애를 항상 위협하고 있는 우리 삶의 객관적 절대 부정임에 틀림없다. 어떠한 이상적 신념도 죽음 앞에서는 허위의 손짓으로 끝나고만다. 죽음이 있는 한 모두 절대 부정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절망을 감수해 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우리는 이제 절대 부정으로서의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고찰해야한다. 세상의 어두운 이면을 알지 못한 채 밝게 살아가는 이들은 이 죽음이라는 중대한 절대 부정을 간과하는 무비판적인 안이한 낙관론자들이다. 인간은 깊은 자기 비판에 의해 그 숙명적 절대 부정으로 뛰어들어간 이상 도저히 안이한 낙관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절대 부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죽음, 그것은 또 무엇인가?

생의 가운데 있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실로 한번 크게 죽어 새롭게 소생해야만 한다. 大死一 番 事後蘇生 절대 부정을 내포한 허무주의에서 우리는 완전히 죽고난 뒤 새로운 본래의 인간, 즉 참다운 인간으로서 소생해야하는 것이다! 인간이 구극으로 살아기 위해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최대의 고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참다운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객관적 절대 부정을 부수고 긍정과 부정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객관적 절대 부정 앞에 허무주의로 빠져버린 인간은 이제 신을 찾는다. 자신의 지배자인 타자적 신에 의해 그는 이제 절대 부정의 늪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하여 절대 긍정의 천국으로 이른다. 하지만 그는 타자적 신을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며 지지 근거로 삼고 있기에 자율적이지 못하다. 그는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 완전한 자율성을 버리고 절대 수동성의 인간이 되버렸다. 이런 이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비워 신에 절대 수순하게 되는데 이보다 더 높은 고결함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절대 부정 그 자체에 의해서 그 부정된 것 안에 내재하는 참다운 나를 찾는 이들이다. 절대 부정성을 극복하는 깊은 차원의 근원적 자각.. 절대 자율로써 이러한 자들은 더 이상 자신 이외의 타자적인 신과 부처의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히 무신론적으로써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나타내면서도 나타난 것에도, 나타나는 것 자신에도 결박되지 않는. 공간적으로 무변하게 세계를 형성하고 시간적으로 무한하게 역사를 창조하는 절대 주체의 자각을 한다. 스스로 절대적 숙명 앞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는 것. 그것을 나는 깨달음이라 말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는 맹목적 낙관론에서 시작해 심각한 비관론에 휩싸인 허무주의를 지나 의타적, 타율적 극복에 이어 이제는 절대 자율적 깨침의 인간상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 그 자체의 구극의 아포리아가 스스로 사라져 새롭게 영원한 생명이 소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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