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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살때 5월에 대한 기억들.
게시물ID : sisa_9426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밥탱이
추천 : 11
조회수 : 56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5/20 23:04:17
저는 고향이 광주입니다. 본적이 쌍촌동입니다.

광주 북구 운암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요.

중학교는 당시 전남방직 옆에 있던 전남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최루탄과 페퍼포그와도 낯설지가 않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초반부터 광주떠나 서울근교로 전학하던 90년대 초반까지 5월만 되면 늘상 보던 풍경이었거든요.

1980년 당시 아버지는 운이 좋은건지, 아닌건지 모르겠으나, 당시 금남로에 있던 남선빌딩에 입주해 있던 회사에 다니고 계셨는데.

마침 1980년초에 서울로 발령이 납니다. 그때 딱 1년을 광주를 떠나있었어요.

그리고 81년에 다시 광주로 돌아와서 북구 임동(당시에는 슬럼가같은 동네였습니다. 지금은 터미널이 들어와있고 보기 좋게 발전했습니다.)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당시 학업을 마치신다고 전남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셨고요.

90년대초반 광주를 떠나는 그날까지 5월이면 금남로쪽에 보도블럭들이 성치못했던것 같습니다.

다 바닥에 뽑아 던져 뿌셔서 그걸로 투석을 했거든요.

5월만 되면 버스의 노선이 바뀌고, 아예 버스가 끊기고. 집이 멀어도 걸어다니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남대가 위치한 용봉동쪽은 말할것도 없었고요. 

초등학교 갖 졸업해서 중학교에 까까머리하고 다니던 애기가 눈밑에 치악바르면 눈이 덜 따갑다는 형님, 누나들 얘기를 길바닥에서

듣고 다녔어요.

5월이면 그 더운 날씨에도 두꺼운 쑥색 진압복에 시커먼 방석모쓰고 자기 키만한 방패를 들고 열을 지어 서있던 전경들 잊혀지지않고요.

그 반대편에서 이웃에 살듯한 형님 누나들이 눈이 충혈되어 벌겋게 눈물흘리며 서있던 모습이 생생하네요.

어릴때부터 광주의 5월 얘기들을 많이 들어서 지금시점에서 누가 개소리를 하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저는 이웃들에게 들었거든요.

시내와는 동떨어진 주택가의 화장실에 불이 켜져있었다고 M-16을 자동으로 조준 사격해서 관통되고 탄흔이 남은것도 직접봤고요.(맞으신분이 계시고.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광주에 살땐 페퍼포그, 최루탄을 5월 즈음해서 늘상 봐오다가 서울쪽으로 이사오고 나선 여지껏 보질 못했어요. ㅎㅎ

대학다닐때 한총련 연세대쪽 사건을 군대에서 접했고요.(아이러니 하게도 제가 근무했던 사단이 90년대 초반까지 신촌쪽 섹터삼아 대민간소요진압훈련-충정훈련-을 했던 부대입니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는데.

저는 그 80년 5월을 피해서 딱 1년을 서울에서 살다가 다시 내려갔는데.

제 이웃들이 겪은 일들이 어머어마해서. 감히 위로도 못하겠습니다.

대학다닐때 코앞에 칙칙이(수포작용제) 들고 있던 전경들을 봤을때도 겁나기보단 내 광주의 이웃들은 총구앞에서도 버텼으니까...

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올해 그간 광주에서 살았던 제 유년시절 추억의 집을 매도하고 씁쓸했었는데. 그냥...한번 이제는 다시 갈일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광주에 한번 내려가 보고싶네요.

모르겠습니다. 당시 저는 여렸으나, 지나온 세월을 살아오면서 부채감을 떨칠 수가 없네요.

P.s 
어머니는 지금도 1980년 딱 그 한해만 서울에서 살았는데, 그때 서울 안가고 광주살았으면 니 아버지 분명히 충맞아 돌아가셨을거라고 말하십니다.
사실 한겨례신문 창간할때 제 교육보험 헐어서 수백만원어치 한겨례 주식을 샀다가 어머니께 등짝 맞으셨고요. 한겨례에서 준 메달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아버직께서 요새 하는 꼴보고 버리셨을지도..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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