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우리들은 노예에요 노예. 자기 자신이 자유인줄 아는 노예. 사실 이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서민이라는 노예. 하지만 우리가 노예라는 걸 진정 스스로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버리지요. 학교에서 등수놀이 하고 그 등수놀이로 학교가 정해지고, 또 그 학교 안에서 등수놀이로 학과가 정해지고 그렇게 차근 차근 정해진 길을 밟으면서 우리는 우리 일생의 진로가 학사모를 쓰면서부터 이미 절반 가까이나 정해져버려요. 별 생각없이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인생의 굴곡이라곤 고작해야 시험성적 그래프와 통장에 적힌 액수뿐이죠.
여러분들이 고등학생 때는 학교에 반나절이나 넘게 묶여있으면서 억지로 야자하고, 자기가 하고싶은 것들 꾹 참아가며 입시공부에 매진해봤자, 그렇게해서 좋은 대학가고 좋은 대기업에 취직해봤자 여러분들이 될 수 있는건 고작 조금 더 잘 사는 서민뿐이에요. 우리는 우리 모두가 뻔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세상 속에서 살고 있어요. 평범한 직장인이 서울에 집을 사려면 연봉을 고스란히 10년 이상 모아야해요. 전세도 대출이 필요하고 결혼까지 생각하면 정말 집안 거덜나죠.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 뻔하고 지루한 나날들이 너무나 역겨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여러분은 도망치지 못해요. 대학교 다닐 땐 항상 직업에 대한 환상을 갖기 마련이지요. 굉장히 재밌을거라는 둥 보람있을거라는 둥. 하지만 이 시대의 대다수의 직업군들. 특히 사무직들의 경우는 창의적인 업무가 아닌 단순 작업의 반복과 그 연장선 뿐이에요. 일이 손에 익고나서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다보면 더 이상 일에선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주말만 기다릴뿐이지요. 일요일 저녁부터 기분이 안좋아요. 왜요? 월요일날 출근해야되니까요. 이 세상의 수많은 근로자들이 자신의 일에 만족하지 못해요. 어렵게 들어온 직장, 더럽고 치사해도 다 이겨내면서 이제야 편해지기 시작했지요. 윗사람들도 믿어주고 후배들도 많아지고, 그런데 일이 재미가 없어요. 도무지 심장이 뛰지를 않죠. 로또라도 담청되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는다면, 사람들은 아마 당장 일 때려치고 자기가 하고싶은 것들부터 해나가거나 아니면 자기가 하고싶은게 뭔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찾아볼 것같아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한 수단으로써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렇게나 일을 지루해하고 혐오하는데도 직장을 떠나지 못하는건 이 사회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우고 있어서지요. 전세 대출 자금이며 다음달 카드값이며 내야할 돈들은 투성이인데다가 이직도 쉽지가 않아요. 무엇보다 심각한건 내가 잘하는 게 뭔지를 모른다는 거죠. 대학도 나왔고 전공도 있는데, 직장 생활도 했는데 내가 뭘 잘하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어요. 사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 깊게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살아요? 그냥 그렇게 이냥저냥 밥만 먹고 살면서 주어진 불만족스런 현실에도 억지로 만족하면서 사는 삶은 짐승과 다를 바 없어요. 자고로 밥먹는 문제가 해결이 되면 그 다음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말해야해요. 사람은 삶의 의미가 있을 때 진정 행복한거에요. 남을 도우면서 더 큰 행복을 찾는 역설적 존재가 바로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깨닫고 가르치는 일이 바로 인간으로서 해야하는 일이에요. 진정으로 인간 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알고 삶의 가치를 알아 그것을 깨닫고자 노력하는 것. 구도자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깨닫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아마 제일 먼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드바르트 뭉크 作, <병든 소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적으로 모순적 존재가 되요.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전부 그러합니다. 생명의 탄생과 함께 죽음이 공존해요. 태어나면서부터 그 생명은 언젠간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죽어야만하는 운명을 타고납니다. 존재와 그 존재를 부정하는 비존재가 함께 공존하는 모순적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이 근원적 모순에 기초한 위기를 극복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항상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합니다. 살아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 어느 때 갑자기 사라질지 몰라요. 그리고 그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가 이전까지 인식해왔던 그 존재 자체의 모든 것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문제는 이런 숙명적인 모순, 모순된 존재로서 갖게되는 필연적 불안과 절망감을 느끼는 것부터가 첫단계입니다. 어릴적부터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한 사람들은 이러한 필멸자로서의 근원적 불안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요.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단지 죽음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이 통째로 삶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꿰뚫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근원적 위기를 자각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생사가 없는 혹은 가치와 반가치가 없는, 선과 악이 없는, 초월도 내재도 아니며 자신도 타인도 아닌, 마음도 물질도 아니며 옳고 그름도 아닌, 사랑도 미움도 없으며 안도 밖도 없고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는. 과거와 미래도 없는 오직 본래의 나에 대해 깨닫는다면, 평범한 범부가 진정한 생명이 될때 그는 마침내 불안없는 세계를 창조하고 또한 역사를 창조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깨달은 인간으로서 생에도 사에도 구애받지 않고, 선과 악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활동해 가는 자재한 인간이 진정한 인간입니다. 그렇게 현실에 살아 움직여가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인간이 사는 방법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이야기는 자칫 형이상학적이고 우리의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져있는 종교적 가르침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삶이고 인생이며 본질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삶으로서 가장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숙명적 가치이지만 사람들이 위와 같이 오산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현실 자체가 우리가 점진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꿈꿀수 있는 단계를 짓밟아버리기 때문이에요.
당장 일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급급한데 이런 뚱딴지같은 이야기에 귀기울일 시간이 어디있겠어요? 그러다보니 그냥 주어진 현실에서 아둥바둥하며 살아가는데 문제는 그렇게 살아도 형편이 나아지는 거 하나 없다는게 문제지요. 그리고 이런 뻔한 앞날과 어두운 미래를 깨달아버린 이들은 현실이 주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죽음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OECD 가입국 중 대한민국이 10년째 자살율 1위를 기록하고 있어요. 무엇이 그들을 죽게 만들었는지는 지금까지 앞에서 수없이 얘기해왔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요지는 바로 이 사회를 바꾸는 데 있습니다. 올해 1인당 국민소득GNP이 2만 6천달러에 달했고 환율에따라 3만달러 돌파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정작 소득세 내는 국민들의 절반이 넘는 수가 200만원도 채 벌지 못했어요. 나름 건전한 노동했다는 사람들 치고 부자됬다는 사람들 거의 없었지요. 나름 괜찮은 코스를 밟아 성공한 샐러리맨으로서의 삶이 막을 내린 후 중년이 된 은퇴자들도 저마다의 퇴직금을 손에 쥐고서 자기 가게를 열지만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결국 쌓여만가는 것은 빚과 주름살. 가끔가다 사업에 성공했다는 이들이 입에 몇번 오르내리지만 대다수의 현실은 처참합니다. 자신의 20대시절부터 약 20여년간의 청춘을 악착같이 돈만 벌어 부동산 사업에 투자했다 성공해 일확천금을 한 여인은 세련된 옷을 입고 강단에 서서 오로지 임대업을 해 부자가 되라고 강의하구요. 수강생들은 모두 부동산 책에다 고개를 쳐박고 어디다 투기하면 돈을 더 잘 벌수 있을까만을 궁리합니다. 공장의 근로자들과 폐지 공병을 싣고 리어카를 끄는 노인들, 식당에서 서빙하는 종업원과 편의점에서 바코드를 찍는 캐셔. 그리고 아침에 출근해 새벽까지 야근하는 사무직들.. 이들이 평생을 바쳐 돈을 벌어도 부동산 임대업으로 월 몇백 몇천을 누워서 받아먹는 부동산 임대업자들의 소득을 따라잡을 순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소위 잘나간다는 상류층이 된 이유로는 부동산이 단연 1위. 2007년 당시 50억을 시가하던 건물이 지금은 200억에 달했는데 이는 이쪽 상가의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이 7년동안 각각 40만원, 60만원 오른 반면 빌딩은 150억이 오른 것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대한민국 사회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도 얻는 대가가 그만큼에 미치지 못하고, 불로소득 자본놀이에만 거의 모든 부가 집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 딱 그만큼 받으면 그것이 바로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기회 균등의 평등한 사회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근로를 하게 되면 중산층으로라도 살 수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기본 정신이 아니겠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열심히 일을해도 가난을 못벗어나는 계층이 400만에 이릅니다. OECD 기준, 멕시코와 칠레에 이어 근로시간 3위. 저임금근로자 비율 1위. 노동환경 최악. 남녀임금격차 1위. 10년 연속 자살율,노인 자살율 1위. 출산율 꼴찌. OECD 선진국들의 평균 최저임금이 1만원을 웃도는 반면 우리나라는 2014년 기준 5000원을 조금 넘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6천불이 넘었지만 소득세를 내는 근로자들 중 200만원도 못버는 근로자가 절반을 넘어요.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아둥바둥 살아도 우리는 항상 기득권이 만들어놓은 다람쥐 챗바퀴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안에서 쉬지 않고 달리는 무의미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며 한치 앞만 보고 살아가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생각도 못해보고 우물쭈물하다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망하고 의미없는 인생인가요? 평범한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박한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견성見性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던 심지어는 지극히 평범한 삶과 소박한 삶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저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에 그 자체로써 현존함으로 모든 것에 의미를 싣는 참된 삶을 살아갑니다. 다만 그러한 사람들의 자발적 소박한 삶과,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강요받는 강제적인 소박한 삶은 그 의미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지요.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살아간다고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현실에 불만족스러워하고 이 불만족이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기원되었다는 것을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결방법이라고 내놓은 것이 고작 그런 단편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만 쫓아가는 것이니 우리 사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건 이 말도안되는, 우리의 삶을 속박하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시스템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이러한 시스템이 왜 우리를 속박하는지, 또 어떻게 속박하는지 그것을 알아내야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사회의 부의 재분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들이 사회로부터 속박받지 않고 자신의 정당한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스스로 자유롭게 삶에 대해 의미를 갖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며 함께 해소하고자 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마침내 인간으로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作, <달을 응시하는 두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