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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심 변두리, 허름한 모텔 방. 방 안은 후덥지근 했다. 일곱 남녀의 더운 숨결과 방황하는 시선은, 방의 열기를 식힌답시고 틀어놓은 고물 에어컨의 냉방력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 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남성이, 한참 만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 대체 왜들 그러셨습니까?
2.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생방송 “새 아침”입니다. 오늘의 헤드라인입니다. 어제 오후 2시 경, 수도권 외곽의 한 주택가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화재의 현장은 단층 건물로 된 다세대 주택이며, 근원지는 반지하 방이었는데요. 최초 발견자가 화재를 제보했을 당시 이미 건물이 반쯤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충격적이게도 화재 근원지에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망자는 인터넷 상에서 대단히 유명세를 탔던, 일명 인터넷 소설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가 인터넷에서 사용했던 필명은 ‘복날은 맛집’이었다고 합니다. [집주인 김 모씨 (57세) 인터뷰: 어… 이 방에 살던 총각은 무슨, 인터넷에서 소설을 쓴다고 하던데… 아주 조용하고, 체구도 작고, 한 마디로 눈에 잘 띄지 않는 타입이었어요. 찾아오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긴 했는데, 인터넷 팬클럽 회원이라나 뭐라나 하는 사람들 뿐이었고, 그 외 가족이나 친지는 없는 것 같…] 이 사건에는 다수의 특이한 사항이 발견되어 더욱 시선을 끌고 있지요. 우선 화재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전기장판 과열인데요, 한껏 무더운 이 초여름에 전기장판이 과열될 정도로 작동되고 있었다는 점이 의문으로 떠오릅니다. 뿐만 아니라 시신이 발견된 당시 모양새도 다소 특이했습니다. 노트북 본체를 끌어안은 상태로, 고개를 품 속 깊이 처박은 자세였는데요. 가장 기이한 점은, 사망자가 생전에 쓴 “어느 소설가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묘사했던 사체의 자세 그리고 사망 방식이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유명한 추리소설가로, 그의 미스테리한 죽음이 세상의 화제가 되면서 그를 죽였다고 자백하는 범인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결국은 주인공 자신이 더는 글을 쓸 수 없다는 좌절감에 의해 자살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 그 글을 쓴 사망자 본인 또한 자살을 한 것은 아닐까요? 세간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3.
새벽 6시 반이 갓 넘은 시간, 실내 테이블 중 반의 반도 다 못 찬 다소 한적한 국밥집. 창가 구석 테이블에 홀로 앉은 손님은 숟가락을 손에 쥔 채로, 절반 남짓 남은 국밥이 다 식어가는 데도 그저 멍하니 아침 방송을 보고 있었다. 퉁, 테이블 위로 박카스 한 병이 놓여지고서야 비로소 그의 눈빛이 깨어났다. “요즘 아침 방송은 너무 말이 많아. 그렇지 않아요, 선배님? 저게 뭐야, 이번 사건 디테일을 우리보다 방송국이 더 자세히 아는 것 같은 투로구만.” 테이블 위에 박카스를 내려놓은 사내는 맞은 편 의자에 몸을 털석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국밥이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임 형사는, 한참 후배인 두 형사가 가져다 준 박카스를 집어 들며 그저 잔잔한 미소를 띌 뿐이었다. 흔해 빠진 박카스 한 병을 무슨 보약 마시듯 천천히 식도로 넘긴 후 임 형사는 “고마워, 진짜 잘 마셨어”하는 인사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두 형사는 안타까웠다. “그 까짓 게 다 뭐라구요. 선배님 요즘 엄청 피곤하시죠,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맡으셔서. 용의자들은 여전해요?” 임 형사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지 뭐” 한 마디 뿐이었다. 임 형사의 별명은 “사임당”이었다. 사람 좋은 임 형사입니당, 의 준말이라나. 아닌 게 아니라 임 형사는 한 마디로 좋은 사람이었다. 영화 따위에서 흔히 보여지는 형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차분하고 점잖은데다가 말수가 적었고, 몸은 다소 다부진 편이었으나 크다고는 할 수 없는 덩치에, 그나마 170cm가 미처 안 되는 신장, 그리고 둥그스름한 얼굴을 반 나마 가린 둥그스름한 금테 안경이 더욱 편안한 인상을 주는 타입이었다. 손발이 저리 느려서 어떻게 형사가 됐을까 싶을 정도로 행동은 꿈뜬 편이었으나 그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체體보다는 지知와 덕德에 더 비중이 있었기에 직장내 누구도 그 점을 불만 삼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선후배 동료를 막론하고 누구나 임 형사를 신뢰하고 아끼고 따랐으며, 가정에서 그는 다정한 남편이자 세상 둘도 없을 딸 바보였다.
두 형사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저는 지금 퇴근합니다, 선배님. 선배님도 어지간하면 오늘은 집에 들어가세요. 어차피 국과수 결과 나오기 전에는 뭐 하나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임 형사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래, 자네야말로 푹 쉬고, 언제든 내가 뭐 도울 거 있으면 얘기하고. 박카스 잘 마셨네.”하고 인사를 건넸다.
4.
방송이 나간 직후, 방송국에는 전화가 폭주했다. 그 중 대다수는 방금 방송된 내용이 사실이냐, 혹은 정확한 보도냐, 는 류의 질문이었으나, 개중에는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의 전화도 있었다. 즉, 자신이 살인범이라고 자백하는 내용의 전화가 총합 무려 스물 두 통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련의 조사 끝에 그 중 열 여섯 통은 장난전화인 것이 확인되었다. 문제는 나머지 여섯 명의 용의자였다. 그들 여섯 명의 공통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복날은 맛집’ 팬카페의 회원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사망추정시간 당시 알리바이가 없다는 점.
5.
- 용의자 인터뷰 녹취메모:
[ 최무정. 46세, 단순 노동자. 특이사항, 우울증 진단을 받은 전력이 있음. “원래는 그 사람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 사람 글을 읽고 나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어떤 때는 뒷맛이 씁쓸하고, 어떤 때는 존나 못 알아먹겠고, 어떤 때는 엄청 허무하고… 아무튼 짜증이 슬슬 나더라고요. 그런데 뭐 댓글들 보면 다들 칭찬 일색이고… 어느 날 도저히 못 참겠어서 악플을 하나 달았는데, 그 인간 팬이라는 것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내 댓글에 공격성 답글을 달고, 나를 신고하고 난리더라고요. 그 인간 하나만 없어지면, 이런 거지 같은 일은 없을 거 아녜요.”
김남우. 24세, 휴학생. 특이사항, 군미필. “그 개X끼가 쓰는 소설인지 뭔지에는 매번 등장인물이 최소한 하나 죽어나가는데, 매번 그 죽는 캐릭터 이름이 김남우란 말이에요. 형사님이 내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거 기분 딥따 조까튼 거라고요!”
송서선. 26세, 단란주점 알바. 특이사항, 17세 때부터 7년 간 모 연예기획사의 연습생이었으나 끝내 데뷔 불발. “(껌을 씹으며) …원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고. 그냥 좀 놀래켜 줘서, 인터넷에서 워낙 유명하니깐, 나하고 있었던 일을 소설로 써서 올리면, 화제라도 좀 되지 않겠나, 싶은, 뭐, 그런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근데 아저씨, 내가 살인범으로 밝혀지면여, 미녀 살인마, 뭐 이런 식으로 기사 내 줄 수 있어여?”
홍혜화. 31세, 주부. 특이사항, 결혼 후 8개월 차부터 남편과 별거 중이며 자녀는 없음. “(흐느끼며) 복날 오빠랑은, 오프 때 처음 만났구요... 그 이후로 오프 때마다 꼬박꼬박 나가서 만났고… 나 진짜 오빠 좋아했는데… 처음엔 나한테 호감이 있는 눈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심호흡) 서서히 거리를… 두더라고요… 나는 설마 설마 했어여. 근데, 그러다가… 그간 오프에 꾸준히 나왔던 사람들하고… 단톡을 하게 됐는데… 복날 오빠가 글쎄, 길궁경인가 하는 기집애한테 마음이 있는 눈치라고, 다들 그러지 뭐예요! 그 말을 듣고 그만 욱해서…”
정재준. 19세, 무직/편의점 알바. 특이사항, 사망자와 같은 고시원 거주. “……..묵비권인가 뭔가, 그거 할게요.”
공치열. 23세, 무직/소설가 지망생. 특이사항, “(언성을 높이며 발을 구른다) 아놔, 답답해! 형사님 이거 좀 보세요. 왼쪽에 이게 내가 그간 써서 모아놨던 시놉들이고, 오른쪽이 그 인간이 써서 올린 소설들 줄거리 요약해 놓은 거거든요? 여기, 이거 좀 보세요! 요괴 시리즈, 이것들은 내 소설 아이디어 죄다 훔쳐간 거라니까여! 이게 말이 됩니까? 여기 요괴 묘사해 놓은 것 보세요,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게 거대한 눈덩이인 줄로만 알았다”고 해놨죠? 그리고 이쪽은 제가 쓴 글이거든요 – “온몸에 하얀 촉수가 달린 몸통이 무슨 커다란 눈더미 같은 요괴였다”. 이것 보세요, 이건 뺴도박도 못할 표절이죠! 이렇게 남의 아이디어 갖다가 글을 써올리고, 그걸로 유명세 타고! 그런 인간은 죽어도 싸요!”]
6.
임 형사는 용의자 인터뷰 녹취메모를 다시 한번 – 벌써 네 번째 – 차분히 읽었다. 어차피 다른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가운데 자백만으로 진범을 골라야 한다면 과연 이 중 누구의 진술이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있을까… 가뜩이나 가까운 미간을 더욱 좁히며 집중하고 있는 임 형사를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박 경감이었다. “어이구, 임 형사. 요즘 힘들지? 올 상반기 매스컴 최고의 사건의 담당을 맡았으니, 원.” 워낙 성품이 팍팍해서 팍 영감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 경감이, 이렇게 다소 간드러지는 말투로 접근해 온다면 뭔가 특별한 요구 사항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임 형사는 오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임 형사는 예의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자기보다 못해도 다섯 살은 연하일 박 경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팍 영감의 오른쪽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이 사람아, 바쁜 걸 바쁘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할까봐서. 요즘 그 사건 때문에 집에도 잘 못 들어간다며. 고운 딸내미 눈에 밟혀서 어떻게 해, 그래. 따님은 잘 지내고?” 임 형사는 박 경감이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예, 뭐 그 아이야 저보다 더 바쁘기는 합니다만… 저번처럼 7시까지 댁으로 찾아뵐 수 있을지 확인해 볼까요.” 박 경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뭐 그냥 사인이나 몇 장 해달라고 하려던 참인데… 그렇게 해주면야 나야 더할 나위 없이 고맙지. 아니, 요즘 통 방송에서 안 보이길래…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말이야. 에흠, 그럼 잘 부탁하네.”
임 형사의 막내딸은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걸그룹 <트웰뷰>의 리더였다. 하필 박 경감의 17살 난 개차반 아들이 트웰뷰 팬클럽의 회장일 줄이야. 어쩌겠는가. 그나마 술을 따르거나 잠자리까지 요구 받는 자리에 끌려나가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한숨을 쉬며, 임 형사는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여보, 난데. 막내 지금 어딨지?”
와이프의 작은 한숨 소리가 수화기로 전해졌다.
“어디 있기는요, 지 방에 있어요. 아직도 기분이 썩 안 좋은지...”
그랬다. 아직 매스컴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딸은 최근 우울증 및 공황장애 진단을 받아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기획사의 도움과 트웰뷰 멤버들의 양해가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일이지만.
“내가 생각해 둔 방법이 있으니… 곧 좋아질 수 있어요. 당신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힘냅시다, 우리. 그나저나 오늘 애 컨디션 괜찮으면, 저번처럼 박 경감 댁에 가서 저녁이나 좀 먹고 오게 해주겠소.”
아내의 침묵에 잠시 가느다란 떨림이 더해지더니, 곧 울음을 삼키고 마음을 다잡은 듯 잠긴 목소리가 되돌아 왔다.
“알겠어요, 제가 잘 구슬러 볼게요. 몇 시까지 보내면 돼요?”
7.
아직 초여름인데도 그 온도가 33도에 육박하는 취조실 안. 남자 넷과 여자 둘, 그리고 형사 하나가 앉아 있다. 침묵의 무게까지 더해져 한층 더 텁텁해야 마땅할 공기는, 인간들이 벌이는 묘한 신경전 탓에 오히려 더 팽팽해져 있었다. 임 형사는 조용히 발끝을 내려다 보며 이제 이 사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복도를 내달리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침묵을 깨뜨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두 형사였다. “선배님! 국과수에서 결과가 나왔는데요 – 이거, 자살이랍니다, 자살! 피해자는 평소 당뇨가 있어 자가주사를 해왔는데, 타고 남은 잔해 속에서 독극물이 검출 된 주사기 일부가 발견되었답니다.” 방금 전까지 서로 자신의 유죄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추풍낙엽처럼 바닥을 헤매었다. 두 형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당신들 뭐야, 대체. 거짓 자백도 범죄인 거 알아, 몰라!” 임 형사가 조용히 일어나서 두 형사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자살이라고 밝혀졌다니 됐지 뭔가. 이 사람들도 나름 사정이 있지 않겠나.” 임 형사는 인자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 저는 사건이 해결되었으니 이걸로 됐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는 제가 알아서 할 생각이지만, 어디 자리를 옮겨서 여러분의 속사정이나 좀 들어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8.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최무정이었다.
“저는… 사실 최근 일거리가 통 없었습니다. 동거하던 여자랑 최근 헤어지면서 그년 빚까지 다 떠안은데다가… 이제 어디 오갈데도 없고 해서… 살인자라고 하면 최소한 콩밥은 얻어먹을 수 있겠거니 해서 그만…”
최무정이 물꼬를 트자 남은 사람들도 순순히 숨은 동기를 고백했다.
“김남우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매번 죽어나가는 게 기분이 나빴다는 건 사실이지만… 저는 영장이 나왔는데… 군대는 진짜 죽어도 가기 싫… 대인기피증이 생겨서 다니던 학교도 휴학했는데… 후우.”
“솔직히, 살인자일지언정 언론에 제 이름이 노출되고 이리저리 매스컴도 타고 하다보면 다시 연예인이 될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진범은 밝혀질 테니 그 동안 만이라도 방송을 타서…”
최무정에 이어 김남우와 송서선의 고백이 이어지자 머뭇거리던 홍혜화도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러니까… 제 남편이 질투심이 심한 타입이거든요… 제가 딴 남자한테 홀딱 반해서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혹시라도 남편이 재결합하자고 할지도 모른다 싶더라구요… 저쪽 아가씨 말마따나 진범이야 언젠간 밝혀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남편이 저를 다시 찾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에요… 흑흑.”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 마음이 바뀐 것인지, 그간 제일 말이 없었던 정재준도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오랫동안 짝사랑 하던 여자애가 있는데, 고백에 애원에 협박 비슷한 것까지 해도 저한테 마음을 안 열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 복날 뭐시긴가 하는 놈한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하길래… 제가 그 놈을 죽였다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면 사람까지 죽일까 그런 생각을 한 번 쯤은 할 거 아니겠어요? 더구나 걔는 원래 나쁜 남자나 강한 남자 같은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어서, 저를 좀 다르게 봐 줄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이유가 하찮다는 듯 콧방귀를 꾸던 공치열은 거품을 물었다.
“그 놈이 제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건 진짜라구요! 그 놈 글이나 내 글이나 아이디어도 비슷하고 전개 방식이나 문장력도 비슷한데, 왜 다들 그 놈이 쓴 글에는 열광을 하면서 내 글에는 댓글 하나 안 달아주고 무시하는지, 젠장… 그 놈을 죽인 범인이 쓴 글이라고 하면 한번쯤은 진지하게들 읽어줄 거고 또 그러다 보면 재평가 받을 기회도 생기고, 그러다가 또 잘 풀리면 작가를 죽인 살인범이, 그 작가를 능가하는 글을 썼다는 게 화제가 돼서 대박이 날 수도 있고, 뭐 인생역전이라는 게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형사님!”
9.
사람 좋은 임 형사는 자비를 털어 거짓 자백을 한 이들을 위해 성대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모텔 주인이 추천해 준 맛집에 전화를 걸어, 삼선 짜장이니, 볶음 짬뽕, 탕수육, 팔보채, 양장피 따위를 시켜 소주와 함께 대접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아픈 사연들을 다독이고 위로해 주었다. 새벽까지 각자 신세한탄과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하던 여섯 남녀가, 여명이 밝을 무렵부터 좁은 방 안 여기저기 머리를 누이고는 하나 둘씩 잠들자, 임 형사는 남은 술과 음식, 식기들을 싹 모아서 방문 밖에 내놓은 다음 조용히 자리를 떴다. 실로 오랜만의 퇴근이었다.
10.
간만에 집으로 들어서는 임 형사를 맞이하는 아내의 얼굴에 웬일로 화색이 돌고 있었다.
“어머, 여보, 어서 오세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안 그래도 이따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임 형사는 아내의 밝은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피곤한 눈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었다. “무슨 일이길래? 당신 그러고보니 아직도 참 곱구려.”
아내는 싫지 않은 얼굴로 곱게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당신 마누라 고운 게 하루이틀이유? 마누라가 이쁘니 딸도 이쁘게 낳았지! 막내가 어제 박 경감 댁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는 다시는 그딴 자리에 나가라고 하지 말라고 소리를 빽 지르고는 제 방에 틀어박혔더랬어요. 그래서 걱정하다가 잠들었는데, 아까 6시 쯤 갑자기 안방에 뛰어 들어와서 날 깨우더라구요. 간밤에, 팬카페 채팅방에서 자기도 팬인 척 하고 사람들 채팅하는 걸 모니터 했다는데, 요 며칠 사이에 인터넷 커뮤니티 여기저기에 우리 막내에 관해 좋은 글들이랑 선행 목격담 같은 게 자주 올라왔나 보더라고요! 그 동안 인터넷 악플, 루머, 그리고 최근 자꾸 팬카페 탈퇴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 고생이 좀 심했어요? 너무 좋다고 날 붙잡고 울다 웃다 한참 그러더니 좀 전에 자러 갔어요. 일어나면 씻고 회사에 나가봐야겠다고 그러더라구요. 너무 좋지 뭐예요, 여보.”
숨도 안 쉬고 딸의 근황을 전하는 아내의 말을 듣는 임 형사의 얼굴에서도 피로한 기운이 가시더니 미간이 밝아졌다. 딸 바보 아니랄까봐, 기쁜 소식을 들은 임 형사는 대충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다시 현관을 나섰다.
“여보, 어딜 또 나가세요. 곧바로 출근하셔야 하는 거였어요?”
“아니, 잠깐 어디 가볼 곳이 생각나서 그래요. 내가 담당하던 사건이 하나 마무리 돼서, 서류 정리는 젊은 친구들한테 맡겨 뒀고 이따 들어와서 씻고 좀 쉬고 내일 아침에나 출근하면 되니까 당신은 신경 쓸 거 없어요. 길어야 두어 시간이면 돌아올 테니 당신도 맘 편히 있구려.”
11.
임 형사는 강원도 어느 외진 산 속 폐가 앞에 서 있었다. 이놈저놈 지리멸렬한 신세한탄까지 섞은 술주정을 다 받아줘 가며 밤을 새고 나서, 아무도 돌보지 않아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풀숲을 헤치고 무성해진 나뭇가지를 밀어내면서 산을 탄 사람 치고 임 형사는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골격이나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만큼은 50대의 나이에도 여전했다. 다 스러져가는 폐가의 대문을 슥 밀자, 녹 슨 경칩이 한 많은 여인의 숨 죽인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창문을 다 막아놔서 빛이 들지 않는 폐가 내부에는 은은한 푸른 빛이 서려있었다. 폐가 한쪽 구석, 낡고 반쯤 부서진 침대 위에 청년 하나가 누워 있었다. 눈만 깜빡거리지 않았다면 송장을 앉혀놓은 게 아닌가 생각될 만큼, 마르고 창백하고 피폐한 얼굴이었다. 폐가 내부의 빛은 그의 손에 들려진 폰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폰에서 흘러나온 빛은 안 그래도 기묘한 각도로 꺾여 있는 청년의 다리를 더욱 뒤틀려 보이게 만들었다.
“오…셨어요.”
마른 입술을 간신히 떼는 청년의 음성은 곧 사그러질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사람 좋은 임 형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작가라더니, 글 솜씨는 다소 쓸만하더군.”
임 형사가 청년을 마주하고 섰다.
“우리 딸애가 간밤에 인터넷에서 자네가 써 올린 미담이며 목격담 같은 걸 읽은 덕분에 기운을 차렸다네. 나도 짬을 내서 몇 편 찾아 읽었는데 정말로 다 다른 사람이 쓴 것 같더군. 그간 수고가 많았어.”
청년의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얼굴에는 미세하지만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렇니까? 정말, 정말이지, 다행이네요… 그럼 처음 말씀하셨던대로 이제 저를 놓아주시는 거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제가 쓴 글이 따님의 명성에 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가 <그녀들을 관찰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다>를 썼을 때만 해도 따님이 속해있다는 트웰비라는 걸그룹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고, 따님의 이름이나 상황이 제가 악역으로 묘사한 캐릭터와 겹친 것도 어디까지나 우연…”
청년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임 형사가 기습적으로 날린 주먹에 턱을 맞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임 형사는 다 낡은 침대보를 찢어서 이미 기절해 버린 청년의 입 안에 한 움큼 쑤셔넣은 후, 청년이 듣거나 말거나, 넋두리 같은 혼잣말을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우연이거나 말거나, 네 놈이 썼다는 그 글 때문에 내 딸은 지금 우울증에 공황장애 판정까지 받았단 말이다. 아니, 애초에 우연이 겹쳐도 그 정도까지 겹친다는 게 말이나 돼? 우리 막내가 리더인 그룹 <트웰뷰>는 열 두 명의 예쁜 아이들이라는 뜻이라고 내가 말해줬지. 네 놈이 써갈겼다는 그 글도 열 두 명으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 얘기라며. 하필이면 나쁜 년 캐릭터 이름이 임여우가 뭐냐, 임여우가. 네가 우리 딸 임영우를 염두에 두고 임여우라는 이름을 붙인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심지어 나이까지 똑같게 설정했더구만. 그 글에 열광한 네 놈 팬이라는 잡것들이, 그 글이 소설인 척 하면서 임영우의 만행을 암시한 거라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우리 딸이 속한 그룹은 지금 망하게 생겼잖아. 아니, 우리 딸은 이미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스물 한 살 밖에 안된 창창한 애가 공황장애가 웬말이야. 내가 네 놈을 납치해다가 미담이며 목격담을 써서 올리게끔 조치하지 않았어봐라. <트웰뷰>는 지금쯤 망하고도 남았을 거고, 우리 딸은 아직까지도 악플에 시달리고 있겠지.”
임 형사는 주머니 속에 챙겨 온 노끈을 청년의 목에 꼭 맞게 감고는, 아직 허물어지지 않은 침대 프레임을 지렛대 삼아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너하고 나이대랑 체구가 비슷한 노숙자를 찾은 게 천우신조였다. 하늘은 자기를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허허… 내가 형사가 된 걸 참 감사한다. 형사로서의 경험이, 그 노숙자를 구슬려다가 너를 대신해서 자살로 위장하는 데 참 큰 도움이 되었단 말이지.”
며칠 간 식사는커녕 깨끗한 물 한모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육체적 폭력과 정신적 압박을 가까스로 견디던 청년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침대 프레임이 마침내 쩍 갈라지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사람 좋은 임 형사. 선후배 동료도, 30년을 살 비비고 살아온 고운 아내도, 그에게는 목숨 같이 귀중한 막내 딸도, 아무도 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다. 그는 정말이지,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